2025년 12월 05일(금)

스위스 존엄사 단체 '디그니타스' 창립자, 93세로 별세... "존엄사 택했다"

스위스 존엄사 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의 창립자 루트비히 미넬리(Ludwig Minelli)가 93세를 일기로 조력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1998년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이라는 슬로건으로 디그니타스를 설립한 그는 자신이 평생 옹호해온 '죽을 권리'를 몸소 실천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사이트루트비히 미넬리 디그니타스 창립자 / Dignitas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디그니타스 측은 성명을 통해 미넬리가 지난달 29일 93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자신이 설립한 디그니타스 시설에서 조력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했다고 밝혔습니다.


단체는 "창립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삶과 죽음의 자기 결정권과 선택의 자유를 지향하는 국제적 전문조직으로 계속 운영·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BBC에 따르면 1932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미넬리는 젊은 시절 언론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50년대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 특파원으로 일하며 기자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언론인을 떠나 인권변호사로 전향한 뒤에는 '죽을 권리'를 둘러싼 법적 투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인사이트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미넬리는 1998년 디그니타스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삶 속의 존엄성, 죽음 속의 존엄성(dignity in life, dignity in death)'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존엄사를 지원하면서 디그니타스는 스위스 내 다른 유사 단체와 달리 존엄사가 허용되지 않는 국가 거주자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미넬리는 수많은 법적 문제에 직면했고, 스위스 연방대법원과 유럽인권재판소에 여러 차례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며 조력자살 관련 법적 논란을 이어왔습니다. 특히 2011년 유럽인권재판소가 개인이 삶의 종말 시기와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인정한 판결은 그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스위스 법은 의사가 직접 치명적 주사를 놓는 등의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한 사람이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약물을 스스로 주입하는 의사 조력자살은 수십 년 전부터 합법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이는 당사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미넬리는 2010년 BBC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마지막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며 "그 마지막 인권은 스스로 삶의 끝을 결정할 권리, 그리고 위험이나 고통 없이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했습니다.


인사이트YouTube 'ABC News In-depth'


미넬리가 설립한 디그니타스는 현재 전 세계 1만 명 이상의 회원을 두고 있으며, 설립 이후 약 4,000명이 단체를 통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뿐 아니라 미국과 아시아 출신 회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런 철학은 전 세계 조력자살 합법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디그니타스가 설립된 후 약 30년간 국제적 인식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현재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스페인, 오스트리아, 미국 10개 주에서 조력자살이 합법화되었습니다. 프랑스도 최근 말기 질환 일부 환자에게 조력자살을 허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디그니타스를 통해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2023년 8월 말기 암 환자였던 조순복 씨가 스위스 디그니타스에서 의사가 건넨 약물을 직접 마시고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디그니타스를 통해 사망한 여덟 번째 한국인 사례였습니다.


인사이트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반면 한국은 여전히 조력자살이 불법입니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으로 심폐소생술 등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해졌지만, 스스로 약물을 복용해 생을 마감하는 행위는 자살방조죄로 처벌됩니다.


이로 인해 일부 환자들이 해외로 나가 존엄사를 선택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넬리의 죽음은 그가 평생 추구해온 가치의 실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운 단체에서 스스로의 신념대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자기결정권'이라는 철학을 끝까지 실천했습니다. 디그니타스는 그의 죽음을 "창립자가 전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개인의 자유의지와 자기결정권을 옹호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루트비히 미넬리의 삶과 죽음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존엄사'라는 복잡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남긴 디그니타스는 앞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죽을 권리'에 대한 선택지를 제공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