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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 6인이 남긴 마지막 소원

제77주기 광복절을 맞아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헤아려보자.

인사이트15일 오전 '태극기 물결 대행진'에 참가한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 종로구청에서 보신각 방향으로 행진하는 모습 / 뉴스1


[인사이트] 최재원 기자 = 오늘(15일)은 제77주기 광복절이다.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을 수 있었던 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나라를 수탈하는 동안 목숨을 바쳐 독립을 외쳤다. 이들은 일제의 끔찍한 고문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한결같은 뜻을 내비쳤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나라의 완전한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말 가슴 먹먹해지는 말 여섯 가지를 소개한다.


이들의 진심을 함께 읽어보며, 오늘 하루 순국선열을 기리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1. 유관순 열사(1902~1920)


인사이트(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유관순 열사 / 뉴스1, (오)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 카드에 올라와 있는 유관순 열사 / 뉴스1


충남 목천군(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1919년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꽃다운 열아홉 살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는 일제의 악독한 고문 속에서도 오로지 나라의 독립만을 생각했다. 유 열사는 서대문형무소 감옥 안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2. 윤봉길 의사(1908~1932)


인사이트윤봉길 의사 / 뉴스1


충남 덕산군 (현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렸던 쇼와 덴노의 탄생 기념행사에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시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에 불과했다.


윤봉길 의사는 사형 전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 편지에 이렇게 썼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하였습니다.


백 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3. 강우규 의사(1855~1920)


인사이트(왼) 강우규 의사 / 국가보훈처, (오) 서울역 광장에 있는 강우규 의사 동상 / 뉴스1


평안도 덕천군 (현 평안남도 덕친시)에서 태어난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서울 남대문에 방문한 조선의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이후 숨어있던 친일 경찰 김태석에게 붙잡혔다.


그는 1920년 2월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29일 66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숨을 거뒀다.


강 의사는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4. 조마리아 여사(1862~1927)


인사이트(왼)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 국가보훈처, (오) 안중근 의사 / 안중근 기념사업회


황해도 해주군(현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민족의 계몽을 위한 재원 마련에 힘썼다. 또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여러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여사는 큰아들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아들에게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5. 안중근 의사(1879~1910)


인사이트(왼) 조마리아 여사 장남 안중근 의사 / 안중근 기념사업회, (가운데) 조마리아 여사 차남 안정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 조마리아 여사 삼남 안공근 / 국가보훈처


황해도 해주목 (현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삼흥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중 계몽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됐다.


이후 그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여순(뤼순)감옥에서 30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사형 전 최후의 유언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6.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인사이트김구 선생 / 독립기념관


황해도 해주목 (현 황해남도 태탄군)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평생을 오직 조국만을 위해 살았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종로에서 상소를 결의하고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했다.


또 양산학교 등을 세우며 민족 계몽에 힘썼다. 김구 선생은 광복 이후 6·25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국군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을 받고 숨졌다.


김구 선생은 독립 전이나 후나 한결같은 나라 사랑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는 생전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