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철호씨와 그의 딸 이리나 / Anne Marie Huck Quay
[인사이트] 강유정 기자 = 6·25 전쟁 직후 난민이 되어 노르웨이로 건너간 소년.
빈털터리 전쟁 난민이었던 그는 노르웨이의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한 '라면왕'이 됐다. 그 주인공은 바로 故 이철호 씨다.
지금으로부터 84년 전인 1937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이 되던 해 6·25 전쟁을 겪었다.
이씨의 가족은 피난을 가야 했고 혼란 속에서 이씨는 가족과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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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그는 전쟁고아가 되어 폐허가 된 도시를 배회했다. 먹고살기 위해 그는 미군 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와 임진강을 건너려다 거센 물살에 휩쓸렸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에서 죽기 직전 미군에 의해 구조됐다. 미군의 도움으로 그는 미군 부대에서 영어를 배우고 헤어졌던 가족과 다시 만났다.
그가 죽을 뻔한 적은 또 있었다. 속초에 있을 당시 심한 폭격으로 온몸에 파편이 박혔고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다.
부상이 너무 광범위하고 출혈이 커 의사들은 그의 치료를 포기했고 사망 판정을 받은 그는 시트에 싸여 영안실에 안치됐다.
(좌측에서 두 번째) 연극에서 일본인 역할을 맡은 이철호 씨 / Klikk.no
얼마 후 그는 의식을 되찾았다. "도와주세요. 제발. 저 살아있어요!" 오랜 외침 끝에 그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간호사에게 발견됐다.
그리고 이때 이씨는 노르웨이 의사 파우스 박사를 만났다. 파우스 박사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어린 학생이 몸을 크게 다친 모습이 안타까웠던 파우스 박사는 그를 살려내기 위해 1954년 4월 4일 그를 데리고 함께 노르웨이로 향했다. 그는 그렇게 노르웨이로 이민을 간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이씨는 돈을 벌기 위해 화장실 정화조 청소, 일본인 단역 배우, 신문배달부, 벨보이 등의 잡일을 도맡아 했다.
돈이 없어 새 모이용 빵을 사서 물에 불려 먹기도 하고 썩기 직전인 채소를 먹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져 실려가기도 했다.
미스터 리 라면 / reddit
그러던 그는 1950년대 후반 상업학교에 들어가 처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일하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실력을 인정받고 장학금을 받고 스위스로 유학을 다녀온 뒤 독일에서 식당을 개업했다.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는 요리사 면허를 딴 뒤 다양한 사업을 했다. 식당 체인을 하기도, 인삼차와 발가락 양말을 수입하기도 했다. 사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이씨는 50살이 넘은 나이에 라면 사업을 시작했고 이 사업은 그에게 큰 성공을 안겨줬다.
딸 이리나와 故 이철호 씨 / klikk.no
당시 노르웨이에서 라면은 익숙지 않은 음식이었기에 인스턴트 라면도 없었다. 농심에서 라면을 수입해 판매하던 그는 얼마 후 '미스터 리(MR. Lee) 라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결국 '미스터 리 라면'은 성공했고 그는 TV 광고에까지 출연하며 노르웨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가 됐다.
그가 만든 '미스터 리 라면'은 20년 이상 노르웨이 시장 80%의 점유율을 자랑했다. 한때 점유율 95%를 기록하기도 했다고.
이씨는 한국에 여러 차례 방문하며 노르웨이와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존경받았다. 2004년에는 노르웨이 국왕 공로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2월 16일, 그는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다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많은 이들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수성가를 이뤄낸 그를 기억하며 용기와 희망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