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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 손에 죽을 수 없다"···사형 선고받은 독립운동가 장진홍 의사의 '마지막 선택'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의거를 했던 장진홍 의사는 일본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사이트장진홍 의사 / 대한광복단기념단 홈페이지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경북 구미에서 정치인들이 출사표를 던지기에 앞서 찾는 곳. 바로 장진홍 의사의 동상 앞이다. 


장진홍 의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다. 동상은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의사를 기리기 위함이다. 


1907년 군대가 사라진 대한제국은 1910년 국권마저 빼앗겼다. 


남이 있는 군대라고는 황실을 지키기 위한 소수의 '조선보병대'뿐이었는데 의사는 이곳의 군인이었다. 


인사이트장진홍 의사의 칼 / 독립기념관


이런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건 1916년이었다. 더이상 일본의 치하에서 군인 노릇을 할 수 없었다는 판단에서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을 여행하며 일본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본 의사는 폭탄 제조기술을 배우기에 이른다. 


이어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벌꿀 선물로 위장한 폭탄을 보내 폭발시켰다. 이 폭발로 은행원과 경찰관 등 5명이 중상을 입었고 은행 건물의 창문 70개가 모두 부서졌다. 


한국인의 독립을 향한 의지를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으로 알린 의사는 제2의 거사를 준비하던 중 조여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오사카로 건너갔지만 결국 체포됐다.  


인사이트장진홍 의사의 사형 선고를 알린 1930년 2월 18일 동아일보 기사


인사이트장진홍 의사가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보낸 옥중 서신 / 독립기념관


1930년 대구에서 그의 재판이 열렸다. 사형이 선고됐다. 의사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에 하늘을 바라보고 크게 웃더니 돌을 꺼내 재판장에게 던지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외쳤다.


"너희들 일본 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 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겠다"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의사가 조선 총독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사형일이 다가올 때까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은 계속됐다. 의사는 결국 치욕스러운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걸 택하겠다며 자결했다. 


김영범의 저서 '경북인의 국내 의열투쟁'에 따르면 의사는 한동안 모았던 수면제를 한꺼번에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본 경찰이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했지만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무덤을 지나던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옷깃을 여몄다.  


한편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