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이 핵무기 정책 논의를 금기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국가 원칙으로 지켜온 '비핵 3원칙'의 재검토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보유·제조·반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일본의 국시(國是)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 / GettyimagesKorea
19일(현지 시간)아사히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고이즈미 방위상은 전날(18일) 공개된 인터넷 방송 '겐론 테레비'에서 "일본으로서는 논의하기 어려운 과제이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핵"이라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각국이 핵 정책을 변경하고 있는 사례를 제시했다. 프랑스는 핵전력 증강에 나섰고, 핀란드는 자국 영토로의 핵무기 반입을 허용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위기감을 갖고 모든 정책을 금기 없이 논의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올해 안에 개정하려는 3대 안보 문서 논의 과정에서 비핵 3원칙도 예외로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전략, 방위계획대강, 중기방위력정비계획을 의미한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비핵 3원칙의 재검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의 것을 지키는 것이 먼저이고 일본을 지키는 것은 뒤로 밀려나 있는 것이 아닌가"라며 비핵 3원칙 유지를 주장하는 야당을 비판했다. 이는 안보 현실과 원칙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재고해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 GettyimagesKorea
일본은 그동안 미국의 핵우산 아래 안보를 유지해왔으나, 비핵 3원칙 때문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처럼 미국의 전술 핵무기를 자국 영토에 배치하는 핵 공유 방식은 금기시해왔다.
핵 공유는 핵무기 보유국이 비보유 동맹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유사시 공동 운용하는 방식이다. 나토 회원국 중 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터키 등 5개국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역시 과거 비핵 3원칙 중 '반입 금지' 원칙의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최근 국회에서 관련 논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관련된 모든 과제를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지난달 연립여당인 일본유신회도 3대 안보 문서 개정 제언에서 미국 핵우산에 의한 확장 억지력을 강조하며, 현상 유지가 아닌 '현실적인 검토'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확장 억지력은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군사력으로 대응한다는 개념이다.
일본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 / Facebook '小泉 進次郎'
일본 내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이유로 비핵 3원칙 재검토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반면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평화헌법 정신을 들어 비핵 3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비핵 3원칙은 1967년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천명한 이후 역대 정부가 계승해온 정책이다.
이번 고이즈미 방위상의 발언은 현직 각료가 공개 석상에서 핵 정책 논의의 필요성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예상된다.
일본 정부가 안보 환경 변화를 이유로 비핵 3원칙에 대한 입장 변화를 시사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올해 안에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완료할 계획이다.
국민 대다수가 지지하는 정책인 비핵 3원칙이 실제 재검토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인 가운데, 향후 개정 과정에서 관련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주변국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일본의 핵 정책 변화는 동북아 안보 지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