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총선에서 래퍼 출신 발렌드라 샤(36) 전 카트만두 시장이 이끄는 중도 국민독립당(RSP)이 압승을 거두며 네팔 최초의 래퍼 출신 총리 탄생이 확실해졌다.
지난해 70여명이 사망한 'Z세대 반정부 시위' 이후 치러진 이번 총선에서 청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발렌의 정치적 부상이 네팔 정치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발렌드라 샤 / 유튜브
지난 8일(현지 시간) 네팔 선거관리위원회는 발렌 전 시장이 동부 자파-5 지역구에서 6만8348표를 획득해 K.P. 샤르마 올리 전 총리(1만8734표)를 압도적 격차로 제치고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카트만두포스트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발렌은 전날 저녁 당선이 확정되자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차량을 타고 지역구를 돌며 환호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RSP는 전체 지역구 165곳 중 106곳에서 승리했으며, 개표가 진행 중인 19곳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어 125곳(75.8%)을 석권하는 압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 카트만두 시장 당선으로 정치에 첫 발을 내딛은 발렌에게는 놀라운 성과라고 외신들은 평가했다.
발렌드라 샤 / 인스타그램
1990년 카트만두에서 전통의학 치료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발렌은 어린 시절부터 시에 재능을 보였다.
이후 투팍, 50센트 등 미국 래퍼들의 영향을 받아 힙합에 빠져든 그는 네팔과 인도에서 토목공학 학사·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네팔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서 지배층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는 음악으로 랩 스타가 됐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가사가 담긴 그의 대표곡 '발리단'(희생)은 유튜브에서 네팔 아티스트 최고 수준인 1280여만 회 조회수를 기록했다.
발렌은 페이스북·유튜브 등에서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확보하며 네팔 청년층과 직접 소통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카트만두 시장 선거에 출마한 발렌은 청년층의 폭발적 지지를 받아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는 시장 재임 기간 동안 고질적 문제였던 쓰레기 처리 시스템과 교통 관리 개선, 의료 서비스 보장 등 도시 인프라와 서민 민생 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전국적 인기를 얻었다.
다만 공공 토지 무단 점거 해결을 위해 경찰력을 동원해 노점상을 강제 철거하면서 인권단체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발리단' 뮤직비디오 중 한 장면 / 유튜브
지난해 9월 올리 전 총리가 이끄는 좌파 연립정부의 부패에 항의하는 'Z세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발렌은 활발하게 SNS 활동을 펼치며 시위 지도자로 부상했다.
당시 올리 전 총리가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SNS를 금지하자 네팔 전역에서 Z세대 주도 시위가 시작됐고, 총 7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발렌은 시위대를 지지하며 올리 전 총리를 "조국을 배신한 테러리스트"라고 규탄했다.
시위는 네팔 정치 체제와 계급 불평등에 대한 항의로 격화됐고, 올리 전 총리는 결국 SNS 금지 조치를 철회하고 사퇴했다.
이후 발렌은 작년 12월 TV 프로그램 진행자 출신으로 반부패 운동을 벌인 라비 라미차네(49)가 2022년 발족한 신생 정당 RSP에 합류했다.
2026년 3월 2일(현지 시간) 네팔 다막 자파 지역에서 라스트리야 스와탄트라당(RSP) 총리 후보 발렌드라 샤를 지지하는 네팔 지지자들이 선거 운동 중 환호하고 있다. / GettyimagesKorea
이번 총선에서는 처음 투표하는 80만 명의 청년층 유권자들이 핵심 유권자 집단으로 부상했다.
네팔은 지난 20년 가까이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 마오주의 공산당, 네팔회의가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번갈아 집권해왔다.
발렌은 지난 1월 카트만두 시장직을 내놓고 총선에 출마하면서 자신의 근거지인 카트만두가 아닌 올리 전 총리가 4선을 지낸 '텃밭' 자파-5 지역구를 선택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AFP와의 선거운동 기간 인터뷰에서 그는 쉬운 길을 고르지 않고 주요 인물과 경쟁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RSP는 지난달 120만 개 일자리 창출, 강제 이주 감소, 국민 의료보험 등 안전망 제공 공약을 발표했다. 높은 실업률과 낮은 임금으로 수백만 명의 네팔인이 해외로 떠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RSP는 5년 내 네팔 1인당 소득을 1447달러에서 3000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을 현재의 두 배 이상인 1000억 달러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다.
발렌은 자신과 RSP가 공유하는 이념을 빈곤층을 위한 무상교육·의료 등 "사회적 정의를 갖춘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Z세대의 최우선 요구는 좋은 통치다. 이 나라는 부패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음악은 자신을 표현하는 매체"라며 "내가 총리로 당선되더라도 음악 활동은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6년 3월 5일(현지 시간) 네팔 카트만두의 한 투표소에서 라슈트리야 스와탄트라당(RSP) 대표 발렌드라 샤가 총선 투표를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GettyimagesKorea
네팔 정치 평론가 푸란잔 아차랴는 "발렌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SNS의 짧은 메시지를 통해 젊은이들과 꾸준히 소통한다는 점"이라고 로이터에 설명했다.
그는 "총리가 되고 나면 총리 일이 '식은 죽 먹기'는 아닐 것"이라며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주변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망했다.
아차랴는 "팀과 전문가, 지원이 필요하다"며 "현행 국가 기구 하에서는 그는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고, 흰개미에게 공격당한 나무처럼 망가진 채 끝날 것"이라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