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올해 발표한 핵심 안보 문서에서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동시에 삭제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양국의 이러한 변화는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존 접근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지난 5일(현지 시간)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에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2022년 발표한 NSS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로 가는 가시적인 진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명시했던 것과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집권 시절인 2017년 NSS에서 북한을 16차례나 언급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강제할 옵션을 향상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전략 문서에서는 정책 기조 변화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GettyimagesKorea
이번 NSS는 총 29쪽 분량으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안보 청사진을 담고 있지만, 북한은 주요 안보 위협 목록에서도 제외됐습니다.
대신 서반구에 대한 전략적 집중과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가 전면에 배치됐습니다. 이에 대해 대서양위원회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서반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를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목표로 규정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공식 동맹 문서와도 온도 차를 보입니다. 지난달 13일 발표된 한미 정상회담 공동 팩트 시트에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명시돼 있습니다.
중국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중국이 지난달 27일 발표한 '신시대 중국의 군비통제, 군축 및 비확산' 백서에서 기존에 명시해왔던 '한반도 비핵화 지지' 문구를 삭제했습니다. 이는 19년 만에 발간된 군비백서에서 나타난 변화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GettyimagesKorea
중국은 2005년 군비백서에서 "관련 국가들이 한반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등에서 비핵 지대를 설립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고 명시했었습니다.
2017년 아시아·태평양 안보협력 백서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사용됐습니다. 이번 백서에서 중국은 '비핵화' 대신 '정치적 해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중국은 조선반도 문제에 대해 공정한 입장과 올바른 방향을 견지하고 항상 한반도의 평화·안정·번영에 힘써 왔으며 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과정에 전념하고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가 미·중 전략 경쟁의 결과라고 분석합니다.
제임스 마자렐라 대서양위원회 선임연구원은 "이번 NSS는 국가안보전략인 동시에 경제적 국가운영 전략"이라며 "안보보다 경제적 이익, 특히 서반구 이익에 기반해 전략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지오퉁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지난 1년 반 동안 중국은 공식 문서에서 더 이상 '비핵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이는 사실상 북한의 핵보유를 암묵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중국이 공식석상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은 지난해 3월입니다. 당시 왕이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이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쌍궤병진과 단계적·동시적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이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9차 한·중·일 정상회의에서는 8차 회의와 달리 북핵 관련 논의가 공동발표문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 뉴스1(평양노동신문)
북·중관계의 급속한 밀착도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했습니다.
이때 공개된 결과문에서도 '한반도 비핵화'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놓고 중국이 그동안 고수해 온 '북핵 불용' 원칙에서 한발 물러서, 북한의 핵무장을 사실상 용인함으로써 미국을 견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