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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채실험 당했다"···6·25전쟁 중 북한 끌려갔던 '국군포로'가 겪은 노예의 삶

6·25전쟁 중 북한 끌려갔던 국군포로들은 강제 노역소에 끌려가 위험한 작업을 강요받은 것은 물론 생체 실험을 당하기도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인사이트판문점에서 국군 포로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 / 뉴스1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평양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7남매의 장남이었던 조창호는 전쟁이 발발하자 다니던 연세대학교를 중퇴하고 대한민국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에서 중국 인민 해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국군은 4천여 명이 죽거나 행방불명 됐다. 복귀한 병력은 70% 남짓, 가지고 간 무기 10개 중 7개를 잃었다. 


조 소위는 이때 북한군의 포로로 붙잡혔고,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국군은 행방이 묘연해진 조 소위를 전사자로 처리했다. 


인사이트조창호 중위 / KBS


43년이란 시간이 흐른 1994년 대한민국 땅을 밟은 한 노인. 그는 전사자 처리된 조 소위였다. 


북한에서 계속 살았던 그는 탈출을 결심하고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 바다 위에서 표류하다가 남한의 바다로 떠내려왔다. 헤어졌던 여동생과도 43년 만에 상봉하게 됐다. 


극적으로 귀환한 조 소위를 통해 북한에서 국군 포로들의 삶이 폭로됐다. 


북한은 "국군포로 한 명도 빠짐없이 북한에 남는 것을 택해 '해방전사'로 편입됐다"고 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인사이트조창호 중위 / KBS


사실 그는 1952년 함께 붙잡혔던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반동분자'로 낙인돼 13년을 강제 노역소에서 복역했다. 


노역소에서 나온 뒤에도 탄광 광부로 배치돼 노역에 시달렸으며 폐에 돌가루가 쌓여 병을 얻었다. 


그는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300그램 정도였다고 했다. 


43년 만에 돌아온 그는 1994년 11월 25일 육군 중위로 진급, 다음날인 26일에 육군 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갖고 44년 3개월의 군 생활을 마쳤다. 


인사이트뉴스1


조 중위를 시작으로 약 80여 명의 국군 포로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북한에서 '괴로군 포로'라는 딱지가 붙어 불발탄 처리, 탄광 발파, 벌목 등 위험하고 고된 작업만 강요받으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 


미 국방부가 체고군 고위 간부로부터 입수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국군 포로를 대상으로 절단 수술, 생화학 무기 및 방사선 피폭 등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김정일 경호원 출신 탈북자 이영국 씨 또한 2002년 일본 도쿄 외신기자 클럽에서 "북한의 생체실험실은 남포에 있으며 6·25 전쟁 중 국군 포로를 실험 대상으로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사이트6·25전쟁 당시 미군 장병과 윤군 장병의 모습 / 뉴스1


대한민국은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비전향 장기수 64명을 북송했다. 하지만 협정을 통해 돌아온 국군 포로는 없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 80여 명 모두 개인의 힘으로 탈북한 사람들이다. 


정부에서는 현재 국군포로 540명, 납북 민간인 4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수 또한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포로로 끌려간 우리 국민을 위해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