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8일(목)

93년 전 오늘(12일)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이 편안하게 눈을 감은 날입니다

인사이트(좌) 이완용, (우) 이완용 가족 / 온라인 커뮤니티 


[인사이트] 김수애 기자 =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 93년 전 오늘(12일)은 그의 마지막 날이다. 


이완용은 1858년(철종 9년)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세도가인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간 그는 어려서부터 출세욕이 강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 말기 문신으로 있던 1905년, 이완용은 일본으로부터 조약 체결 제의를 받는다.


이때 맺은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이다. 이완용은 조약 체결을 지지하고 솔선하여 서명했다.


당시 이완용은 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 중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에 힘입어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된다.


인사이트YouTube 'KBS역사저널 그날'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완용은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인사, 입법, 행정 등 왕의 내정권을 박탈한다.


당시 현장이 기록된 구한말 학자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완용이 고종을 향해 칼을 빼 들고 고함을 질렀고, 고종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수만 명의 군중이 덕수궁 앞에 모여 이완용의 친일 행위를 규탄했지만 그는 일본에 사법권을 넘겨주는 등 친일반민족 행위에 솔선수범하며 앞장섰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한일 합병 조약 체결의 장본인이 된다. 대한민국은 이 조약을 기점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인사이트YouTube 'KBS역사저널 그날'


이완용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후작의 지위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또한 일본으로부터 남작 지위를 받았다.


또한 당시 소유했던 땅은 2018년 기준 확인된 것만 여의도 면적 7.7배에 달하는 2천 234만㎡로 밝혀졌다.


후에 이완용은 회고록에서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이었다"라는 말을 남긴다.


일평생 나라를 파는 일에 솔선수범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그는 1926년 2월 12일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사인은 노환으로 인한 폐렴이었다.


인사이트현재까지 남아있는 이완용이 죽기 전까지 머물던 저택 / 온라인 커뮤니티


한편 이완용의 직계 증손자 이윤형은 지난 1997년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조상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바 있다.


당시 이윤형은 시가로 30억 원에 달하는 토지를 받은 다음 바로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후손들도 일본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2017년 8월 기준 친일재산조사 위원회가 환수하기로 한 이완용 땅은 실제 그가 소유했던 땅의 0.05%에 불과하다.


역사와 법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단죄를 받지 않은 이완용과 후손은 대한민국 역사에 극악무도한 친일 매국노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