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보훈처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92년 전 오늘인 1926년 12월 28일은 독립운동가 나석주 의사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날이다.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의사는 본디 농부였다.
그러던 와중, 나 의사는 가족과 함께 125년간 가문 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일제의 조선 경제 착취 기업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겼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한국 경제를 독점하기 위해 설립한 국책 회사다.
일제는 해당 기업을 통해 조선인들의 땅, 경제권 등을 수탈하는 데 앞장섰다. 그렇게 빼앗은 토지는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넘어갔다.
나 의사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땅을 일제에 모두 빼앗기고 일 년 먹기도 힘들 정도로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 나 의사 가문의 땅은 일본인에게 양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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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일제에 분노를 느낀 나 의사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 백범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독립투사로 거듭났다.
이후 의사는 황해도 일대 부호들의 집을 털고 주적들을 암살하며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상해 임시 정부로 송금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러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호원이 된 나 의사는 과거 교장 선생님이었던 백범 김구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1926년,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에 가입해 거사를 계획하고 조선 땅으로 돌아온다.
그해 12월 28일,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은 나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향했다.
나 의사는 권총으로 건물을 돌아다니며 일본인 직원들을 사살하고 폭탄을 투척했다.
한국관광공사
그러나 이 폭탄은 안타깝게도 불발했고, 이후 의사는 출동한 경찰과 대낮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곳은 현재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주변, 현재도 번화가인 명동 한복판이다.
이 곳에서 경찰을 피해 도망치던 나 의사는 자신의 총으로 가슴에 세 발을 쏴 서른넷의 젊은 생을 마감했다.
의사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마라!"였다.
나석주 의사의 죽음은 17일 동안 당국이 쉬쉬했으나 이듬해 1월 동아일보의 호외로 그 진실이 알려졌다.
그의 대범한 행동은 일본 경찰에게 큰 충격을 줬고, 우리 독립 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