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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연인을 아직도 못 잊은 이들에게 '말기암 시인'이 건넨 조언

언제나 결 고운 언어로 독자와 대화하던 '말기암 투병' 시인 허수경이 지난 3일 저녁 세상을 떠났다.

인사이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인사이트] 김연진 기자 = 그는 말했다.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고.


아마도 그에게 사랑은 둥근 것이었나 보다. 그 둥근 사랑을 잊지 못해 아파하고, 상처받고,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둥근 것만 보면 옛사랑이 떠오르나 보다.


둥근 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사랑이 어려 있었다.


아직도 눈동자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애틋하고 서글픈 감정이 녹아 있고, 그를 따스하게 바라봐주던 사랑하는 이의 그림자가 깊숙이 비추고 있다.


인사이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그는 고백했다.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다고.


수박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별'을 알지 못했던 시절,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와도 같은 수박의 겉껍질만 바라보던 자신을 원망한다.


아, 내가 그 사람을 정녕 알지 못했구나!


매정하게 떠나버린 그 사람, 감당하기 힘든 이별 앞에서 그는 무작정 떠나간 사람을 원망했었나 보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서 꿈틀대던 원망과 증오는 더이상 그 사람을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자'만을 바라보던 자신을 증오한다.


울적한 마음에 영원히 사랑할 줄만 알았던 태양에게 말을 걸었다. 그제야 알았지만,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인사이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온다는 걸


- 허수경 시인 '수박',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中 -


그는 외쳤다.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다고.


떠나간 사랑을 감당하고 인정하기 힘든 순간에는 그저 증오와 원망이 차오른다.


하지만 그는 이제 떠나간 사랑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기적'을 기다린다.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과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오는 때를.


떠나간 사랑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용기 있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기적을.


인사이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許秀卿) 시인은 1992년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내며 그만의 시집의 세계를 인정받았다.


이후 돌연 독일로 떠난 허수경 시인은 그곳에서 홀로 지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느꼈던 단상들, 감상들, 감정들을 조곤조곤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참 결이 고운 문어(文語)였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독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때로는 따스한 위로, 때로는 날카로운 조언, 때로는 풀 냄새 가득 담은 외침.


그런 그가 지난 3일 저녁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허수경 시인이 갔다. 먼 집으로, 너무 멀리.


그가 떠난 자리에 수박빛 향기가 아직도 짙게 남아 있다.


인사이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