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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못 잊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말기암' 시인이 건네는 조언

이번에 새롭게 출간한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현재 시인처럼, 그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김종욱 찾기'


[인사이트] 김연진 기자 =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그녀는 핏기없는 입술로 말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황홀하고, 외로운, 이 나비 같은 시간들.



△ 봄 그리고 여름, 혼자 가는 먼 집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許秀卿)은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해 방송국에서 스크립터로 일했다.


그러다 1987년, '실천문학'에 총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때부터 시인 허수경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인으로 활동했고, 그렇게 시 '혼자 가는 먼 집'이 탄생했다.


작품에서 시인은 "'그대'가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김종욱 찾기'


△ 가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1992년, 갑작스럽게 독일로 떠난 시인은 뮌스터대학교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품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다.


그곳에서 홀로 지내며 느꼈던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단상들, 감상들, 감정들을 결 고운 언어로 조근조근 종이에 적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을 테다. 시인은 그러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김종욱 찾기'


△ 겨울, 죽음을 맞이하는 힘


현재 시인은 위암 말기다. 암이 다른 곳까지 전이돼 힘겨운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2003년 출간했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15년 만에 새롭게 편집해 산문집으로 재출간하기로 결심했다. 작품명은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라고 정했다.


시인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세상에 뿌려놓은 글 빚 가운데, 다시 손길이 닿았으면 하는 책들을 다시 모아 빛을 쏘여주고 싶다"라고 재출간 이유를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지난날의 시간이 담긴 작품들을 새로이 보여주는 창문과도 같았다.


독일의 뮌스터에 머물며 홀로 생을 정리하고 싶다는 시인.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작품으로 말하고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힘'에서 시인은 깨달았다. 


사는 힘도 힘이지만, 죽음으로 가는 힘도 힘인 것을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김종욱 찾기'


△ 다시 봄, 그 생애의 어떤 시간


이번에 새롭게 출간한 산문집은 현재 시인처럼, 그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어떤 시절을 그리워하고, 누군가는 어떤 장소를 떠올린다. 또 누군가는 어떤 이를 잊지 못해 가슴에 남은 상흔만 어루만지고 있을 게다.


대상은 모두 다를지언정 그 감정의 결은 같다. 모두 '첫사랑'과 닮았다.


시인은 얼마 남지 않은 '나비 같은 시간' 속에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말한다.


"그리움은 네가 나보다 내 안에 더 많아질 때 진정 아름다워진다"


그렇다. 시인은 그리움을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 아름다운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고맙다고 노래한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김종욱 찾기'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산문집 131쪽,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