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4일(일)

방송 작가에게 갑질한 폭로 전문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

인사이트KBS 구성작가협의회 홈페이지 캡쳐


[인사이트] 최민주 기자 =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에 대해 자주 폭로하는 시사 프로그램.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갑질은 그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 24일 오전 KBS 구성작가협의회 홈페이지에는 방송사의 갑질 관행을 폭로하는 한 방송 작가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홈페이지는 방송 작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구인·구직이 이뤄지는 곳이다.


글쓴이는 수 년간 방송계에서 작가로 일하며 겪었던 부조리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지난 2016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 월 160만원을 받는 막내 작가로 들어갔다. 월별 지급이 아닌 방송이 끝나면 6주 후에 일괄 지급되는 형태였지만 처음에는 막내 작가의 월급 치고 넉넉한 돈이라 생각했다.


인사이트SBS '그것이 알고싶다'


그는 "그곳에선 24시간 일을 한다. 6주 중 기획주인 첫 주만 10시쯤 출근해 7시쯤 퇴근하고 2~5주엔 밤낮도, 주말도 없이 일을 한다"고 말했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알량한'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했다. 글쓴이는 "밥 심부름, 커피 심부름이 주 업무고 기껏 커피를 사왔더니 다른 메뉴 먹고싶다는 선배의 말에 다른 것을 사오기도 했다"며 '심부름꾼'으로 일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적폐를 고발하겠다'는 피디들이 이처럼 내부의 문제에는 입을 다물자 그는 담당  피디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는 똑똑한 작가가 아니라 말 잘 듣는 작가를 원하는 데야. 그렇게 똑똑하게 굴 거면 여기서 일 못해. 다들 그래왔고. 그게 규정이야"


근로 환경에 강한 의문을 품은 글쓴이는 고용노동부에 온라인으로 고발을 했다. 그런데 그에게 연락한 고용노동부 소속 조사관의 태도는 의지를 꺾기에 충분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방송 쪽은 제대로 처리가 안될 수 있어요. 그래도 괜찮으면 조사 받으러 한 번 나와요"


왜 방송 쪽은 처리가 잘 안되냐는 물음에 '관례'라는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한편 같은 해 뉴스타파 '목격자들'에서도 작가로 일했다.


면접 때도, 출근하라는 통보를 할 때도 임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고 한다.


첫 출근날 급여에 대해 묻자 담당 피디는 "공중파처럼 120만원씩은 못 줘"라며 곤란한 듯 대답했다.


인사이트뉴스타파 '목격자들'


2016년 당시 최저임금은 '126만원'이었고 공중파의 막내작가 페이는 약 140만원 정도였다.


이 작가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상근을 하며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해야 했다. 시사 프로그램의 특성 상 섭외나 후반 작업이 매우 까다로워 업무시간도 상상을 초월했다.


'목격자들' 제작진은 "사회 정의를 지키는 일인데", "크라우드 펀딩으로 돈이 넉넉지 않아서"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이에 글을 쓴 작가는 이렇게 꼬집었다.


"그럼 당신들도 최저임금도 못 받으면서 일하나? 갑질을 고발하는 당신들이 막내작가에게 갑질을 하는 형국이 아닌가"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이 작가는 현직 PD들의 언행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가 EBS에서 일할 때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던 한 피디는 막내 스태프들과 조연출, 막내 작가에게 "야, 너는 그래서 정규직이 안 되는 거야", "야,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겠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적었다.


'Pray for Korea'라는 문구와 함께 백남기 농민의 사진을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지정해 둔 그 피디는 정작 자신과 함께 일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줄은 몰랐다.


또한 이 작가가 가장 오래 몸담았던 KBS에는 회의에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피디가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대낮부터 거하게 취해 전 스태프가 대기한 회의에 들어와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그 사람은 피디였으니까.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파워당당'했다"고 전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이번 KBS 파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던 그 피디의 모습을 보고 "어쩌면 마음 놓고 낮술을 할 수 있어서 파업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난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해당 글을 올린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방송계에 몸담고 있는 작가들의 현실이었다.


그는 "청년 실업이니, 열정페이니 방송에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웃프다. 저걸 만든 막내작가는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라며 보험은커녕 계약서 한 장 요구하기 힘든 작가들의 현실이 슬프다고 했다.


이틀 전 게재된 글은 26일 현재 조회수 3만여건을 넘어섰고 수많은 현직 작가들이 공감을 표하며 각자 경험했던 부조리를 적어내려가고 있다.


대부분의 방송 작가들은 '프리랜서' 신분으로 고용된다. 그러나 실상은 개인의 자율성은 무시된 채 엄청난 근무 시간과 업무량을 감당해야 한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tvN '아르곤'


이는 비단 몇몇 작가들의 상황만이 아닌 거의 모든 방송사의 현실이다. 10여년 전, SBS에서 막내 작가 한 명이 옥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달라진 점은 없다.


해당 글을 올린 작가의 말처럼 '노동자의 비참한 선택을 조명해야 할 언론이 자신들의 치부가 두려워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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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주 기자 minjoo@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