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눈부신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한 세종대왕의 업적 이면에는 평생에 걸친 만성 질환과 시력 상실의 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추정되는 소갈증과 안질, 극심한 류머티즘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불릴 만큼 가혹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와 국정 쇄신을 멈추지 않았다. 기득권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 '글을 몰라 억울하게 죄를 짓는 백성이 없도록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글자를 만들어낸 그의 행보는 단순한 군주의 역할을 넘어선 진정한 소통 리더십의 표본으로 꼽힌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건강 상태는 국정을 수행하기조차 버거운 수준이었다. 과도한 독서와 육식 위주의 식습관, 운동 부족이 겹치면서 30대 초반부터 당뇨 증세인 소갈증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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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물을 몇 동이씩 마셔야 할 정도로 갈증에 시달렸고, 40대에 접어들면서는 왼쪽 눈의 시력이 거의 마비되고 오른쪽 눈마저 형체를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안질이 악화됐다. 허리와 다리의 관절 통증, 피부병인 임질(淋疾)성 질환까지 겹치면서 세종은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다른 병이 잇따라 일어난다"고 토로할 만큼 극심한 통증 속에서 매일 정무를 처리했다.
눈이 멀어가는 암흑 속에서도 세종이 가장 몰두한 과업은 28자의 독자적인 문자, 훈민정음 창제였다.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와 유교적 질서를 내세우며 한글 창제를 격렬히 반대했다.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의 집단 상소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비밀리에 정의공주 등 직계 가족들과 함께 음운 연구와 글자 제작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기득권층이 한자를 독점해 백성을 통제하던 사회 구조를 깨고, 억울한 백성이 자신의 뜻을 관서에 글로 고할 수 있도록 만든 정보 민주화의 시작이었다.
세종의 애민정신은 문자 창제에 그치지 않고 백성의 일상과 민생 경제 전반으로 뻗어나갔다. 농민들이 계절과 날씨 변화를 정확히 파악해 흉년을 피할 수 있도록 측우기와 앙부일구, 자격루 등 독자적인 천문 기기를 발명해 보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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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집대성한 '농사직설'을 편찬해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으며, 세금 제도를 개편할 때는 전국 17만 명의 백성을 대상으로 전대미문의 여론조사를 실시해 공법(貢法)을 확정 지었다. 형벌 제도에서도 삼복제(세 번의 재판을 거치게 하는 제도)를 엄격히 적용하고 관비(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지급하는 등 소외된 계층의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호했다.
현대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훈민정음은 컴퓨터와 스마트폰 자판에서 가장 빠르고 과학적으로 입력 가능한 문자로 재조명받고 있다.
소리글자이면서도 조합이 자유로운 한글의 구조적 우수성은 글로벌 IT 환경에서 대한민국이 정보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핵심 기술적 토대가 됐다. 육체적 한계와 정치적 압박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백성을 향한 소통의 도구를 남긴 세종대왕의 집념은 오늘날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들에게도 본질적인 통찰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