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1주년을 앞두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기업 창업주들의 이야기가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하이트진로의 창업주인 고(故) 장학엽 선생은 일제강점기 조선어를 가르치다 해고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삶은 단순한 기업가의 성공을 넘어, 민족의 아픔 속에서 교육의 꿈과 독립의 염원을 담아 한 잔의 소주를 빚어낸 역사로 기억된다.
(좌) 진로 창업주 고(故) 장학엽 선생 / 한국학중앙연구원, (우) 참이슬, Facebook '하이트진로'
1923년 4월, 황해도 곡산 공립 보통학교에서 스물한 살 청년 교사 장학엽은 학생들에게 조선어로 권학가(勸學歌)를 가르쳤다.
나라 잃은 슬픔이 묻어나는 학생들의 합창은 일본인 교장의 귀에 거슬렸고, 장학엽은 결국 교사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학교를 세워 실력 있는 젊은이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육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일본은 광산, 철도, 금융 등 주요 산업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조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은 정미소나 양조장 정도가 전부였다.
고민 끝에 장학엽은 양조업 경험이 있던 홍석조, 강기욱 두 동업자와 함께 각자 500원씩 투자해 자본금 1,500원으로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했다. 1924년 가을,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그가 만든 술의 이름은 '진로(眞露)'였다. 생산지인 진지동(眞池洞)의 '진(眞)'과 소주를 증류할 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히는 모습에서 착안한 '로(露)'를 합쳐 지은 이름이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사진=인사이트
진로 소주는 단순한 주류 상품이 아니었다. 이는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장학엽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증류식 소주를 고집했다. 희석식 소주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교육자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장학엽은 1946년, 마침내 진지소학교, 진지중학교, 진지여고 등을 개설하며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사업 기반을 모두 잃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다시 한번 일어섰다. 1954년 서울에 서광주조를 세워 재기에 성공했고, 이때부터 진로의 상징인 두꺼비 로고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1955년 두꺼비가 그려진 진로 / 사진 제공=하이트진로
장학엽은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 등 독특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며 1970년대에는 소주 시장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74년에는 우천학원을 설립하며 교육자로서의 오랜 숙원을 달성했다. 이듬해인 1975년에는 회사명을 '진로'로 바꾸어 오늘날 하이트진로의 기틀을 마련했다.
장학엽 선생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꿈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가 만든 진로 소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은 상징이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 인사이트
오늘날 많은 이들이 광복절에 진로 소주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잔의 소주를 마실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기억하고 되새겨보자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