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한 역사학자가 '친일파 규정 기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주목받고 있다.
지난 11일 역사N교육연구소 심용환 소장은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게재하며 "쉽게 누군가를 '친일파'라고 단정해버리면 친일 부역의 기준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심 소장은 고종 독살설과 관련해 "고종독살설은 '암살설'이고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풍문에 불과했고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간주한다"며 "당시 주치의라고 해서 그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선을 그었다.
배우 하영 / 뉴스1
다만 안상호의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다. 심 소장은 "그가 엘리트였고 대정친목회 등 친일파들이 많이 참여했던 단체에 소속된 것, 그리고 일본이 시정 홍보를 할 때 그의 집안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만년의 그가 존경받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맞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심 소장은 "'친일 부역 행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특정 단체에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고종독살설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대중이 많기 때문에 이미 증조부는 독살의 주체가 되었고 어떤 학자의 발언 하나를 두고 언론이 '역사학계'라고 단정 지음으로 이제 그녀는 친일파의 후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심 소장은 "그냥, 방송 나왔다가 의사 집안 자랑해서 괘씸죄로 걸린 거 아니냐?"라며 논란이 과도하게 증폭됐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심용환 소장 페이스북
하영의 태도에 대해서는 "여배우의 잘못이라면 그러한 가족사의 불편한 진실에 대한 진실한 반성이 없었다는 점"이라면서도 "조상의 좋은 것만 기억하고 자랑을 일삼은 우리의 일상과도 별다른 바 없기도 하다"고 일정 부분 공감했다.
심 소장은 친일파 규정 기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쉽게 누군가를 '친일파'라고 단정해버리면 과거사에 있었던 너무나 많은 이들이 친일파가 될 것이고 결국 친일 부역의 기준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비판하고 기억해야 하는지 그 기준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어 "역사라는 학문과 진실 모두를 오롯이 이 싸움에 바치면서 스스로 선과 악의 단순한 판별자가 되어버리면 그 결과는 역사학 자체의 위기를 몰고 올 것"이라고 역사학계를 향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심 소장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디까지를 '후손'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보다 명쾌한 기준을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다. 연좌가 잘못되었듯 조상의 공이 자신의 공은 아닐 터"라고 제안했다.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
그는 "정확한 기준으로 과거사를 그 자체로 인식하고 배우고 존경하는 것, 그래서 보훈이 아닌 역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어야 한다"며 "역사학계의 역할 또한 그것에 있을 뿐"이라고 글을 맺었다.
하영은 지난 7일 방송된 KBS 2TV 토크 예능 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증조할아버지께서 일본 유학 후 한양에 최초로 서양식 병원을 개원하셨고 고종 황제도 진료하셨다"고 소개했다. 이후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 의혹이 불거졌다.
하영 측은 처음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으나, 추가 입장문에서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인정했다.
대정실업친목회는 조선인 상류층으로 구성된 친일 단체로 이완용이 고문직을 맡았으며, 안상호는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안상호는 1902년 일본 동경 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자격증을 취득했다. 1904년 귀국 후 서울 종로3가에 개인 진료소를 열어 의료 활동을 펼쳤으며 고종을 진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