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의 허리를 지탱하던 화이트칼라 계층에 거센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수십 년간 정장을 갖춰 입고 서류와 씨름하던 엘리트들이 이제는 과감히 넥타이를 풀고 현장 작업복을 입거나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인공지능(AI)의 급격한 발달과 기록적인 구인난이 자리 잡고 있다. AI가 사무직의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며 입지를 좁히는 사이, 일손이 간절해진 육체노동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이른바 노동 시장의 '공수 교대'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에서는 생산직 종사자의 임금이 사무직을 추월하는 역전 현상이 뚜렷해졌다. 이에 따라 평생을 바친 직장을 뒤로하고 택시 운전이나 건설 현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중년 사무직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단순히 생계를 잇는 수준을 넘어, 현장에서 길을 찾은 이들 중에는 이른바 '블루칼라 백만장자'라 불리는 새로운 부유층까지 등장하며 직업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뒤흔들고 있다.
스즈키 요시아키 씨 / 아사히신문
도쿄의 대형 은행에서 영업 책임자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던 스즈키 요시아키(62세) 씨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지난 6일(현지 시간) 일본 아사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조기 퇴직 후 매일 아침 정장 대신 편안한 유니폼을 입고 택시에 오른다. 50세에 미리 따두었던 택시 운전면허는 그의 인생 2막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스즈키 씨는 현재 격일제로 하루 20시간(휴식 3시간 포함)씩 한 달에 15일을 근무하며 연간 800만 엔에서 1,000만 엔(한화 약 7,400만~9,300만 원) 사이의 고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는 60대 이후 급격한 임금 삭감을 겪으며 재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과거 동료들의 처지와 대조적이다.
'엘리트 금융맨' 시절의 스즈키 요시아키 씨/ 아사히신문
그는 "은행원 시절에는 매달 판매 목표와 실적 압박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손님을 직접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내비게이션 덕분에 길 찾기도 수월하다"며 현재 생활에 높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스즈키 씨는 택시 운전으로 번 종잣돈을 태양광 발전과 주식에 투자해 자산을 불리며, 이른바 '블루칼라 백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육체노동을 천시하던 과거의 고정관념은 이제 더 이상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일본 주간지 지지통신과 취업지원서비스 레바잡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실제 설문조사 결과 사무직에서 생산직(공장, 창고, 택시, 간병 등)으로 전직한 인원의 약 25%가 이전보다 높은 급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인력난이 극심한 건설 현장의 중장비 운전기사들은 연봉 1,000만 엔을 상회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반면, AI의 침공을 받은 화이트칼라 전문직의 상황은 우울하다. 일본 노동국 보고서는 회계사와 세무사의 소득이 약 11%, 법률 전문가는 13%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사무직 노동자의 60%가 자신의 업무가 AI로 대체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택시 운전기사의 소득은 최근 4년 사이 40%나 급등했다.
결국 일본의 노동 시장은 '누가 더 높은 학벌을 가졌는가'보다 '누가 현장에서 당장 필요한 기술을 가졌는가'를 기준으로 부를 재편하고 있다. 사무실 안에서의 안정적인 삶이 옛말이 된 지금, 땀 흘려 일하는 생산직이 새로운 부의 창출 모델로 떠오르며 일본 사회의 직업관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