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의 회의실에 오래된 목소리가 다시 들어오고 있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가 주관하는 전략위원회, AI위원회 등 주요 위원회는 2024년부터 회의 시작 전 5~10분간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의 육성을 먼저 듣는다. 사장단이 모이는 자리에서 숫자보다 앞서는 것은 원칙이다. 회의실에 다시 울리는 말들은 지금 들어도 낡지 않다.
"한국처럼 좁은 땅덩어리에 지연, 학연, 파벌을 형성하면 안 된다" 1982년 신입 구성원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故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 사진제공=SK그룹
故최종건 SK그룹 창업회장 / 사진제공=SK그룹
"플로피디스크를 팔면 1달러지만, 그 안에 소프트웨어를 담으면 가치가 20배가 된다" 1992년 SKC 임원 회의에서 남긴 말이다.
이 육성은 우연히 남아 있던 자료가 아니다. 경기 이천 SKMS연구소 창고에 보관돼 있던 녹음 테이프를 꺼내 디지털화했고, AI를 활용해 잡음을 줄이며 다시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정리했다.
2년에 걸친 작업은 지난해 4월 마무리됐다. SK는 이 방대한 기록에 '선경실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복원된 오디오 테이프만 3530개에 이른다. 하루 8시간씩 연속으로 들어도 1년이 넘는 분량이다. SK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2년 가까이 여러 위원회에서 녹취 파일을 틀었는데도 남은 분량이 아직 넉넉하다고 한다.
선경실록이 다시 불러낸 것은 최종현 선대회장의 육성만이 아니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말씀 역시 지금의 경영진 앞에 다시 불려오고 있다. "회사 발전이 곧 나라의 발전", "돈으로는 사람을 살 수 없다. 마음을 주고 사야 한다"는 창업기의 말들은 단순한 어록이 아니라 지금도 SK가 붙드는 출발점이다.
故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 사진제공=SK그룹
이런 장면은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SK 디스커버리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시기와도 맞물린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의장은 최 선대회장처럼 철학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며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에 공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과거를 오늘의 판단 기준으로 다시 세우는 방식이다.
수원시가 최근 게시한 최종건, 최종현 회장 어록 / 사진제공=SK그룹
"Back to Basics"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된다. AI와 반도체가 산업 지형을 빠르게 바꾸는 시기, SK가 먼저 꺼내든 것은 새로운 구호가 아니라 창업의 '원칙'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사람은 으레 출발점을 돌아본다. 속도와 기술이 앞서 달려가는 시대, SK는 회의실 맨 처음 5분을 오래된 목소리에 내준다.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다시 묻기 위해. 미래 산업을 논하는 회의실에서 SK가 가장 먼저 붙드는 것도 결국 그 '기본'이다.
2026년 3월 엔비디아 GTC 2026 행사에서의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 / 사지제공=SK하이닉스
2026년 3월 엔비디아 GTC 2026 행사에서의 최 회장 / 사진제공=SK하이닉스
최종현 SK 선대회장 어록 캘리그라피 / 사진제공=SK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