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상징물로 여겨져 온 음료 자동판매기 산업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물가 상승과 인건비 증가, 편의점과의 경쟁 심화로 일본의 자판기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6일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일본 자판기시스템제조업협회 집계 결과 현재 일본 내 음료 자판기는 220만 대로 집계됐다. 이는 거품 경제 절정기였던 1985년과 비교해 23% 줄어든 수치다.
업계 주요 기업들의 연이은 구조조정으로 기존 사업 모델의 한계가 노출되고 있다. 일본 3위 자판기 운영업체 다이도(DyDo)는 이달 사상 최대 연간 손실을 기록한 후 보유한 27만 대 자판기 네트워크 중 약 7.5%를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다카마쓰 도미야 다이도 사장은 "자판기 사업 환경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며 "손실 확대를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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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녹차 업체 이토엔(Itoen) 역시 자판기 사업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이 업체는 "영업 환경이 크게 악화됐다"며 136억 엔의 손상차손을 인식했다고 밝혔다.
일본 소비자들은 그동안 자판기 판매가격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을 인지하면서도 편의성 때문에 이용해왔다. 하지만 최근 물가 상승이 소비 패턴 변화를 이끌면서 자판기 사업이 위축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편의점의 공격적 마케팅도 자판기 산업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유명 차와 커피 브랜드 제품을 인근 편의점에서 약 20%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으며, 편의점들은 즉석 원두커피 판매도 늘리고 있다. 드럭스토어와 대형 슈퍼마켓에서는 할인된 자체 브랜드(PB) 음료까지 출시하며 가격 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만성적 인력 부족 문제도 자판기 산업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자판기는 정기적인 상품 보충을 위한 인력이 필수적이지만, 일본은 심각한 트럭 운전사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일본트럭협회에 따르면 인력난 여파로 2024년 운전사 임금이 7.1%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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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리테일 분석가 나카이 아키히토는 "자판기는 자동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운영은 여전히 사람에게 의존한다"며 "자동화된 것은 판매 과정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어떤 상품이 팔렸는지 사람이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데이터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판매 정보와 재고 관리가 제대로 디지털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FT는 "자판기는 일본이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이 얼마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업계에서는 수익성 개선을 위한 전략 전환도 나타나고 있다. 아사히음료(Asahi Soft Drinks)는 자판기 시장의 하락세를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진단했다.
이에 따라 운영업체들은 자판기 수량 확대보다는 설치 위치 재정비와 기기 크기 확대를 통해 재고 보충 횟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기기당 수익성을 높이는 전략에 주력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사무실 건물 등에 설치된 자판기에 디지털 시스템을 도입해 수익 증대를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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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변화만으로는 전체 산업 회생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FT는 "교외 지역과 농촌에 설치된 대부분의 자판기는 여전히 고도화된 관리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며 "이미 판매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추가 투자에 나설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