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곳곳에서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 몫을 덜어내는 '얼굴 없는 천사'들의 선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성탄절을 부산 북구 덕천지구대 앞에 3만5000원의 현금과 김치 한 통이 담긴 상자가 조용히 놓여 있었습니다. 상자 안 편지에는 장애가 있는 첫째를 포함해 세 아이를 키우는 기초생활수급자 가장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익명의 기부자는 "올해는 폐지값이 떨어져 돈을 모으기 힘들었지만, 꼭 필요한 아이에게 좋아하는 선물 하나를 사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나눔을 실천한 것은 벌써 8년째입니다.
부산 북구 덕천지구대에 한 기초생활수급자가 두고 간 김치와 현금 3만5000원 / 부산 북구
광주 북구 매곡동에서는 의수를 착용한 남성이 7년간 매년 오토바이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적십자사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와 동전들을 건넸습니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는 올해도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쪽지와 함께 두툼한 돈봉투가 도착했습니다. 이 익명의 기부자는 2021년부터 5년째 총 1125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흥덕면 관계자는 동아일보에 "쪽지 내용이나 형태로 미뤄 기부자가 넉넉한 형편은 아닌 것 같지만, 그 마음은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익명 기부가 수년간 지속되며 누적 금액이 수억 원에 달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충남 논산시의 '키다리 아저씨'는 2001년부터 최근까지 연말연시마다 억대 기부금을 보내며 총 12억2300만 원을 기부했지만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아내의 고향인 논산 지역 어린이와 청소년이 보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행정복지센터 앞에는 ‘7인의 천사’로 불리는 주민이 두고 간 쌀 포대가 쌓여 있다 / 경남 거창군
익명 기부는 세대를 잇는 전통으로 자리잡기도 합니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행정복지센터에는 20년 넘게 쌀과 라면 등 수백만 원어치의 식품을 기부해 온 '7인의 천사'가 있습니다. 이들은 3일에도 쌀 20kg짜리 60포와 라면 100상자 등을 트럭에 실어 왔습니다.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매체에 "아버지 세대에서 시작된 기부를 아들 세대가 이어오며 20년 넘게 지역의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제주 서귀포시의 '노고록('넉넉하다'의 방언) 아저씨'는 27년째 쌀을 기부하며 항상 목도리와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타납니다.
익명 기부천사가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놓고 간 현금 뭉치와 손 편지 /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감사를 전하려는 사회복지기관과 정체를 숨기려는 기부자 사이에는 조용한 '숨바꼭질'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9년째 경남 창원시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입구에 국화꽃 한 송이와 함께 기부금을 놓고 사라지는 남성은 늘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걸어 기부 사실을 알립니다. 그렇게 맡긴 돈이 총 7억4600만 원에 이릅니다.
전문가들은 올해 유난히 익명 기부가 많았던 이유를 잇단 대형 재난에서 찾았습니다. 큰 피해를 불러온 재난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하고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조용히 확인하려는 마음이 기부로 이어졌다는 분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