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2026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부회장 4명을 전원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3분의 1에 해당하는 20명을 한꺼번에 교체했습니다.
동시에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HQ 조직을 없애고, 각 계열사 대표이사와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 체제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세대교체와 실행력 강화를 내세운 고강도 쇄신 인사지만, 숫자와 구조만 놓고 보면 롯데에 가장 뼈아픈 지점은 오히려 이번 인사 뒤편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지난 26일 롯데는 롯데지주를 포함한 36개 계열사의 이사회를 열고 정기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부회장단 전원 용퇴, HQ 폐지, 그리고 CEO 20명 교체입니다. 이동우 롯데지주 대표이사 부회장, 유통과 식품, 건설을 맡았던 각 부문 부회장들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고, 유통과 건설, 호텔, 식품 등 주력 계열사의 대표이사가 대거 교체됐습니다. 회사 측은 비상경영 상황 속에서 거버넌스를 단순화하고 현장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합니다.
사진=인사이트
하지만 이 장면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지난 몇 년간 롯데가 공들여 쌓았던 그룹 총괄 체제, 즉 BU와 HQ를 중심으로 한 사업총괄 실험이 결국 성과로 증명되지 못했고, 이번 인사는 그것을 조용히 정리하는 장면으로 해석됩니다.
HQ를 없앤다는 것은 단지 조직도에서 한 줄을 지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동안 신동빈 회장이 선택해온 그룹 운영 모델을 접겠다는 뜻입니다. 비상경영 선포, 외부 출신 부회장 영입, HQ 권한 강화 등으로 구조를 바꿔왔지만 긍정적 성과를 냈다고 자부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이번 인사의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숫자는 냉정합니다. 한 신용평가사 분석에 따르면 롯데그룹 비금융 계열사의 순차입금은 2019~2021년 약 28조원 수준에서 움직이다가 2022년 37조원, 2024년에는 40조원 안팎까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됩니다. 같은 기간 연간 영업으로 벌어들이는 현금창출력(EBITDA)에 비해 빚이 차지하는 비율도 대략 '3배 안팎'에서 '7배 가까운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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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3년 정도 영업해 돈을 벌면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7년 가까이 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용평가사들은 "화학, 유통, 건설 등 주력 계열사의 공격적인 투자와 실적 부진이 겹치면서 빚은 빠르게 늘고 영업 현금 창출력은 제자리인 구조가 계속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사업별로 보면 더 선명합니다. 롯데케미칼은 글로벌 설비 투자와 중국발 공급 과잉에 맞물려 실적 변동성이 커졌고, 롯데건설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 부담과 부동산 경기 둔화 여파로 유동성 우려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PF 보증 잔액을 줄여 나가고 있음에도, 은행 차입금이 다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백화점과 마트, 홈쇼핑, 이커머스의 이용자 만족도는 높습니다. 특히 백화점에 대한 만족도는 하루하루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통 부문에 대한 정부 규제가 발목을 잡는 상황입니다. 롯데가 자체적으로 규제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점이 뼈아픕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회장단을 정리하고 HQ를 없앤 선택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집니다.
하나는 위기 탈출을 위해 의사결정을 단순하게 만들고, 각 계열사에 더 큰 자율성과 책임을 주겠다는 시도입니다. 중간에 위치한 부회장단과 HQ를 걷어낸 만큼, 앞으로는 각 계열사 CEO와 지주, 그리고 오너에게 성과와 책임이 더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동안 그룹 차원에서 밀어붙여온 총괄 체제가 위기 국면에서 기대만큼 작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하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신동빈 회장 / 롯데지주
비상경영을 꺼낸 지 1년. 일부 계열사는 자산 매각과 재무 구조 개선으로 시간을 벌었지만, 그룹 전체의 이익 체력과 성장 동력이 완전 회복했다고 말하기는 이릅니다. 이번 인사에서 세대교체, 젊은 리더십, 실행력 강화 같은 단어가 반복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조'를 바꿨음에도 '숫자'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인식이 내부에 공유돼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이번 인사를 단순한 실패의 자백으로 몰아가는 것은 가혹합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더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데는 이제 복잡한 총괄 조직 뒤에 숨지 못하게 됐습니다. 유통과 화학, 건설과 호텔 등 각 사업이 앞으로 어떤 투자와 구조조정, 어떤 새 사업으로 위기를 돌파할지, 그 결과는 곧바로 해당 계열사와 그룹 전체의 재무 지표, 그리고 신용도와 시가총액에 선명히 드러나겠죠. 시장은 이미 숫자를 통해 롯데의 체력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번 인사는 그런 의미에서 출발점에 가깝습니다. 부회장단과 HQ라는 중간층을 덜어낸 빈자리에 무엇을 채울지, 각 계열사 CEO에게 맡긴 책임경영이 현장의 속도를 끌어올릴지, 그리고 지주가 재무와 포트폴리오 관리를 통해 레버리지 구조를 얼마나 빨리 되돌릴 수 있을지에 따라 평가가 갈릴 것입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 간 군사적 문제로 인해 중국 쪽에서 타격을 입고, 우리나라와 일본 간 정치 상황으로 인해 타격을 입었던 롯데다. 이 정도 타격을 롯데가 아닌 다른 기업이 입었다면 이미 붕괴가 됐을 것"이라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상황을 보면 롯데의 저력이 느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사진 제공 = 롯데물산
이어 "중국과 관계가 개선돼가는 상황, '노재팬'이 끝나고 일본과 민간 교류가 활발해지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롯데의 회복은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롯데는 비상경영 2년차에 정말 다른 숫자와 다른 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내년에 있을 인사보다는 선명히 숫자로 드러날 재무제표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