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관제사의 비극적 선택, 그 뒤에 숨겨진 현실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없다"
인천국제공항 관제소에서 근무하던 25년 경력의 베테랑 항공관제사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지난 24일 JTBC에 따르면 2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하던 25년 차 국토부 항공관제사 이 모 씨가 관제소에서 숨졌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 이씨는 관제소 옥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JTBC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A4 용지 한 장의 유서에는 관제사들의 처우 개선과 인력 확충을 호소하는 절박한 메시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씨의 유족은 "가족에게 미안하다 한 줄, 맨 마지막 표현은 장기 기증 이야기가 있었다"라고 전했습니다.
항공관제사는 공항의 숨은 영웅입니다. 이들은 24시간 내내 하늘길을 지키며 수많은 항공기의 안전한 이착륙을 책임집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일을 합니다.
동료 관제사는 JTBC에 "누구 한 명이라도 단 하나의 실수가 발생해 어떤 이벤트라도 발생하게 되면..."이라며 업무의 중압감을 토로했습니다.
인천국제공항 관제탑 / 뉴스1
하지만 이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국내 항공관제사는 약 650여 명에 불과합니다. 이는 한국과 연간 여객 편수가 비슷한 일본의 3분의 1 수준에 그치는 수치입니다.
항공 교통량, 노선, 활주로는 계속 늘어나는데 인력은 제자리걸음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과중한 업무
인력 부족은 관제사들의 휴식 시간 보장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24시간 운영되는 공항 특성상 교대 근무는 필수적인데, 충분한 인력이 확보되지 않아 적절한 휴식 없이 고강도 업무를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12월 발생한 무안공항 참사 이후, 이씨의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고 합니다.
유족은 "동료, 후배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 대해 너무 안타까워했고, 여행 중에도 그와 관련한 업무 전화를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오랫동안 노조 활동을 해온 이 관제사는 동료들 사이에서 "일에는 빈틈이 없었고 사람에겐 따뜻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 동료 관제사는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며 "잘 챙겨주시고, 친오빠처럼 때로는 아빠처럼 대해주셨다"고 그를 회상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타인을 생각했던 이씨의 모습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유족들은 "그렇게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 짓눌릴 만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며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항공 안전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관제사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항공 교통량이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관제사 인력 확충과 처우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하늘길의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같은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109 또는 SNS상담 마들랜(www.129.go.kr/109/etc/madlan)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