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 2TV '대왕세종'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한글날인 오늘(9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많은 이들이 이를 근거로 세종대왕을 성군이라 칭하지만, 정작 다른 업적에 대해선 무지한 경우가 많다.
세종대왕은 한마디로 조선이 낳은 천재다. 언어학은 물론 수학과 과학, 철학, 음악, 문학을 두루 섭렵했다.
백성들을 위한 농업과 경제학, 회계학에도 밝았던 것은 물론 군사적인 측면과 인권에도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그의 업적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당대 사람들보다 앞선 생각,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갔다 온 것 아니냐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세종대왕 시기 조선은 이전과 비교해 몇 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세종대왕이 미래를 내다본 정책들을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꿈꿨던 조선은 어떤 나라였으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가 될 듯하다.
1. 관노비 부부의 출산 휴가 정책
EBS '역사채널 e'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다. 그중에서도 노비는 가장 최하층 신분으로 평생 노역에 시달렸으며, 신분을 자식에게도 대물림했다.
이런 노비들을 위해 출산 휴가를 준 왕이 세종대왕이었다.
당시 관청에서 일하는 여성 노비는 7일의 휴가를 받았는데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이 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7년 뒤에는 아이를 낳는 달에도 휴가를 줘 출산 전후로 130일을 쉬게 했다.
또한 여성 노비의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줘 산모를 돌보게 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출산휴가는 90일, 배우자의 휴가는 10일이 부여된다. 이와 비교하더라도 세종대왕의 출산휴가 정책은 상당히 선진적이었다.
2. 재택근무제도 실시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SBS '뿌리깊은 나무'
세종대왕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뽑아 휴가를 줬다. '사가독서제'라고 하는데 온전한 휴가라고 하긴 힘들다.
집에서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라고 준 휴가기 때문이다.
기한은 보통 짧으면 한 달, 길면 3개월이었다. 경우에 따라 기한 없이 계속해서 재택근무를 하는 때도 있었다.
집에서 공부하며 드는 경비는 나라에서 모두 제공한다. 단 매달 세 차례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해 논문을 제출해야 하고, 휴가가 끝날 때는 결과물을 내야 한다.
결과물이 뛰어날 경우 시상을 하기도 했다.
3. 전국 여론조사 실시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SBS '뿌리깊은 나무'
세금을 내는 방법을 두고 백성들의 의견을 물은 이도 세종대왕이 최초다.
이 여론조사는 무려 5개월이 소요됐는데 중간보고 있었다. 중간보고 결과에 따르면 경상도에서는 찬성이 많고,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 북쪽 지방에서 반대 의견이 많았다.
최종 결과 총 17만 2806명의 백성이 조사에 참여했다. 이중 찬성이 9만 8657명, 반대가 7만 4149명이었다.
'세종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는 69만 2477명으로 인구의 4분의 1이 참여한 대규모 여론조사였다.
세종대왕은 결과를 보고 찬성표가 전체의 3분의 2가 넘는 지역을 우선으로 시행하겠다고 밝힌다. 민주주의의 기틀이 다져진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4. 소방서 설치
KBS1TV '한국의 유산'
세종대왕이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 서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1100채가 넘는 집이 불에 타고, 32명이 숨졌다.
이를 본 세종대왕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오늘날 소방서와 같은 기관인 '금화도감'을 설치했다. 지금의 소방서와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라 할 수 있다.
금화도감에서는 화재 예방 교육을 주로 실시했다. 집과 집 사이의 울타리나 담을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무로 짓게 해 이웃집으로 불이 번지는 걸 막았다.
또 '금화군'을 만들어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물을 긷고 나르는 업무를 했다.
세조에 이르러서 금화군은 '멸화군'으로 발전했다. 멸화군은 24시간 상시 대기하면서 불이 나면 곧바로 출동해 불을 끄는 일을 맡았다.
5. 포병 병과 신설
YouTube '국립진주박물관 JINJU NATIONAL MUSEUM'
오늘날 '포방국'으로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는 강력한 화력을 자랑한다. 이 포방부의 시조 격은 당연 세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세종은 1445년 화기 사용이 급증하게 되자 '총통위'라는 새로운 특수 병제를 만들게 된다. 오늘날의 포병 병과라 할 수 있다.
총통위 선발시험은 설치 초기에 경외무역자로 거의 대소 구분 없이 나이 30세 이상의 달리는 힘이 있는 자로 정했으나 1445년 7월 실질적인 선발 시험법이 제정되면서 위치가 확고해졌다.
선발시험은 일정한 크기의 놋쇠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부어 놓고 마개를 빼 물이 윗구멍까지 다하는 동안에 달리는 힘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창설 당시 2400명 수준이었던 총통위 병력은 3년 뒤에 400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주로 궁궐 호위 및 순찰 등의 임무를 했으며 때로는 변방에 파견되어 방어에 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