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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9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나라 구하고 노량해전서 전사한 날입니다"

423년 전 오늘 1598년 11월 19일, 길었던 왜란이 노량에서 종식됐다.

인사이트(좌) 한국문화정보원, (우) KBS1 불멸의 이순신


[인사이트] 디지털뉴스팀 = 423년 전 오늘 1598년 11월 19일, 길었던 왜란이 노량에서 종식됐다.


앞선 1598년 8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게 되면서 왜군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삼키고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바닷길을 막고 있는 이순신이 문제였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과 동맹을 맺은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 퇴로를 막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의 요구를 강경히 반대했다.


"조선 백성을 약탈한 왜군을 한 놈도 살려서 보낼 수는 없소"


인사이트KBS1 불멸의 이순신


결국 조선과 맞붙지 않고서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고니시.


그는 경상남도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해 왜선 500여 척을 노량 인근에 집결시킨다. 최후의 전투를 준비한 것이다.


척후를 접한 이순신 장군도 왜군의 퇴로인 노량에 200여 척의 조명 연합 수군을 주둔시키고 전투를 준비한다.


그렇게 1598년 11월 18일,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를 '노량해전'이 시작됐다.


이날 해전은 야음을 틈타 철수하려는 일본 함대에 조선 수군이 포격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노량 위를 새카맣게 물들인 왜선 세키부네는 조선의 판옥선과 격돌했다.


인사이트영화 '명량'


전의를 상실한 왜군은 힘을 쓰지 못했다. 곳곳에서 폭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이 터올 때까지 왜선 400여 척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고니시에게 남은 건 100여 척의 전의를 상실한 왜선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선두에 서서 필사적으로 왜선을 추격했다. 결코 한 명도 살려서 보낼 수 없었다.


백성들을 약탈하고 무참히 죽이며, 조선의 혼을 짓밟은 왜군을 장군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 순간 왜군의 유탄이 장군의 가슴에 박혔다.


인사이트KBS1 불멸의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중심을 잃고 대장선 위에 쓰러졌다. 그의 눈에는 혼비백산 도주하는 왜선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말했다.


"싸움이 급박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장군은 이 한 마디를 남기고 1598년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본 이문욱(李文彧)은 장군의 시신을 옷으로 가리고 북을 치며 전진했다.


병사들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알지 못한 상태로 왜군을 추격해 대파했다.


인사이트영화 '명량'


이날 노량에서 왜선은 500여 척 중 450여 척이 바다에 가라앉고 왜군 수천여 명이 바다에 수장됐다. 살아서 돌아간 왜선은 50여 척에 불과했다.


그렇게 조선은 7년 간 왜군에게 당한 한을 노량에서 풀었다.


전투가 끝난 후 병사들은 말했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싸움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조선의 한을 풀고 일본이 다시는 침략의 야욕을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후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이순신 장군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