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 서울
  • 15 15℃ 인천
  • 13 13℃ 춘천
  • 10 10℃ 강릉
  • 15 15℃ 수원
  • 17 17℃ 청주
  • 17 17℃ 대전
  • 13 13℃ 전주
  • 17 17℃ 광주
  • 16 16℃ 대구
  • 15 15℃ 부산
  • 16 16℃ 제주

일본 왕족을 처단한 '유일한 독립운동가' 24살 조명하 의사가 사형장서 남긴 말

1905년 오늘(8일) 태어난 조명하 의사는 대만에서 일본 왕족 구니노미야에게 독검을 던져 처단하고, 형장의 이슬로 삶을 마감했다.

인사이트조명하 의사 / EBS 클립뱅크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나는 대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91년 전인 1928년 10월 10일 24세 조선의 젊은 청년 조명하 의사는 대만에서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죄목은 '황족 위해죄'였다.


1905년의 오늘(8일)인 4월 8일 태어난 조명하 의사는 스무 살이 되던 1924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를 보고 큰 감명을 느낀다.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란 가명 아래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인사이트구니노미야 구니히코 / wikipedia


하지만 독립운동의 길을 펼치기에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일본의 감시가 삼엄했다.


결국 1927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일본에서 중국행 배에 올랐다.


큰 뜻을 품고 배에 올랐지만 상해로 가기에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고, 의사는 결국 모자란 자금을 위해 중간 기착지인 대만 타이중시에 내려 녹차 밭에서 일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의사는 품은 뜻을 잃지 않았다. 틈틈이 무술과 검술을 연마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엿봤다.  


인사이트당시 의거가 일어났던 대만 대중 도서관 / EBS 클립뱅크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기쁜 소식 하나가 도달했다.


대만에 주둔한 일본군 검열을 위해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가 온다는 보도를 접한 것이다. 쉽게 오지 않는 기회라 생각한 조명하 의사는 거사를 준비했다. 


1928년 5월 14일 환영식 당일, 의사는 독이 묻은 검을 들고 인파에 섞여 구니노미야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니노미야가 도착해 차에서 내렸고, 의사는 독검을 날렸다.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과 왼쪽 어깨를 스치고 운전사 손에 꽂혔다. 


인사이트조명하 의거 사건을 보도한 일본 신문 / YouTube 'KTV 대한뉴스'


사건 직후 조명하 의사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됐다.


일본 왕족에게 위해를 가한 일. 조명하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용감했다. 사형장에서 의사는 "대한의 원수를 갚았노라"고 말한 뒤 다음의 말을 이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그 말이 구니노미야에게 저주가 된 것일까. 의사가 사형을 당하고 3개월 뒤인 다음 해 1월, 구니노미야는 칼에 찔린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숨졌다.


이후 조명하 의사는 일본 왕족을 처단한 유일한 독립운동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