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영동 1985'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31년 전인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제 겨우 22살 된 청년이 숨을 거뒀다.
故 박종철 민주 열사의 이야기다. 구속영장도 없이 불법체포된 그는 같은 학교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묻는 수사관들의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고문, 전기고문 등이 이어졌지만 끝내 함구했던 박종철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
민주주의를 외쳤던 한 청년의 삶을 앗아간 '남영동 대공분실'에는 수많은 박종철들이 있었다.
대통령 이름만 불러도 잡혀갔다는 삼엄했던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그때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던 피해자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상처를 몸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MBC 뉴스데스크
박종철 열사 31주기였던 지난 14일 MBC 뉴스데스크는 실제 고문 피해자를 만나 당시 끔찍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림사건 고문 피해자 이선근씨와 유동우씨는 30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사람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작게 만든 창문과 수많은 이들이 숨을 헐떡였을 물고문 욕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27살이었던 1981년 '학림사건' 피해자로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받았다. 6년 뒤 박종철이 숨진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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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실을 바라보던 이씨와 유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때의 두려움이 다시 떠오른 듯했다.
이씨는 "(고문대에) 올라가자마자 가죽끈으로 묶더라. 전기 고문에 고춧가루물에 왔다 갔다해서 기절도 2~3번 했다"고 회상했다.
유씨 역시 "바닥, 벽, 천장, 사면 팔방이 다 핏빛이었다. 거기서 두들겨 맞고 짓밟히고 맞고 욕조에서 물 먹이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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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의 몸에는 고문의 흔적과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씨는 3번이나 수술을 했으며, 결혼 이후 3년 만에 간암까지 찾아와 가정생활마저 무너졌다.
재심을 통해 두 사람 모두 누명을 벗었지만 새 삶을 시작하기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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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어부 간첩사건 고문 피해자 박춘환 씨 역시 20대 초반에 받은 고문 때문에 극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박씨는 "먹고 살기 위해 고기 잡다가 이북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니고 이북에 그냥 납치당해서 끌려간 건데"라며 지금도 억울함에 잠을 설친다.
생니까지 뽑혀 나올 만큼 고문을 당해야 했던 박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엉덩이뼈가 부러져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다.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재심으로 5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박씨는 '간첩'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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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국회의원 방북에 연루됐던 '의원 방북사건 고문 피해자' 병양균 씨는 트라우마와 분노조절 장애 때문에 직업도 잃고 이혼까지 해야 했다.
병원을 오가며 약에 의존해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했다.
매체에 따르면 고문 피해자 4명 중 1명은 자살을 시도했고, 우울증 발병률은 76.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경제적 보상뿐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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