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소로 활용된 싱가포르의 진강회관 / 연합뉴스
[인사이트] 배다현 기자 = 싱가포르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가 6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하 여정연)은 22일 "싱가포르 국립문서보관소와 아카이브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과 관리에 조직적으로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사료 140여 건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일본군 위안소 연구는 주로 중국 일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한국인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증언과 사진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영화 '귀향'
한국인 위안부 전체 피해자는 약 8만~20만명으로 추산되나 지금까지 정부가 공식 확인한 피해자는 238명뿐이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여정연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발굴ㆍ정리ㆍ해제' 보고서에 따르면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싱가포르에 거주했던 한국인 위안부는 600여명으로 추산됐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통치했던 1942~1945년에 운영했던 위안소는 10여 곳으로 파악됐다.
위안소는 일본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설립되기도 했고 브로커에 의해 일본식 주점인 요정 형태로 운영되기도 했다.
연합뉴스
발견된 자료 중에는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위안부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다카시 후지와는 구술자료에서 "1942년 9월 혹은 10월에 대략 12명의 한국인 소녀들이 센토사 섬으로 끌려왔다"고 증언했다.
이어 "한국인 소녀들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레스토랑에서 일한다는 일본인 성매매업자에게 속아서 오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1983년 탄 벵 루안씨는 "집 근처에 부대가 많이 있었는데 일본 군인들은 일요일에 위안소로 가 쿠폰이나 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일본 군인들은 음식도 음료수도 먹지 않고 오로지 여자와 즐길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팀
1984년 로우 레이 렝 씨도 "싱가포르 켄힐 로드의 위안소 앞에는 늘 일본 군인들이 50명 정도 줄을 서서 들어가려고 기다렸는데, 영화관 줄 같아 굉장히 이상했다"고 기억했다.
일본 점령기에 탄 톡 생 병원의 치과 조수로 있었던 마크 옹 웬 웨이 씨는 2000년 인터뷰에서 "만달레이 가에 있는 위안소의 한국인 위안부들은 주로 성병 전염으로 치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오영인 교수는 "싱가포르는 역사 보존을 위해 1979년부터 4,100여 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한 후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아카이브로 만들었는데 그중 52건이 위안부에 관한 기록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연구를 통해 동남아 지역 위안부 기록 발굴의 계기를 마련하고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현지인의 시선을 통해 역사적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배다현 기자 dahyeo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