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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전 오늘은 유관순 열사가 옥중 고문으로 순국한 날입니다"

97년 전 오늘은 어린 나이에도 조국의 앞날을 걱정해 독립 운동의 선봉에 나섰던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이다.

인사이트연합뉴스


[인사이트] 배다현 기자 = 97년 전 오늘은 어린 나이에도 조국의 앞날을 걱정해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던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이다.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의지가 굳었던 유관순 열사는 어린 나이에도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이 '한국의 잔다르크'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유관순 열사가 고등과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뜨고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사이트유관순 열차 추모각 / 연합뉴스


이를 들은 백성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고 참다못한 일본 내 한인 유학생들은 2월 8일 독립 선언을 했다.


이어 3월 1일, 서울 도심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인사이트독립문 앞 3·1운동 재현하는 시민들 / 연합뉴스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조선 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 모든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문을 닫은 후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4월 2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유관순 열사는 학생의 신분(당시 나이 18세)으로 여러 학교를 돌며 소식을 알렸고 집집마다 방문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당일, 수천명의 군중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자 유관순 열사는 선두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를 선창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인사이트독립문 앞 3·1운동 재현하는 시민들 / 연합뉴스


장터 한복판에 이르러서는 곡물점의 쌀섬을 디디고 올라 독립을 외치는 열렬한 연설로 군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러나 이를 발견하고 다가온 일본 헌병의 칼에 유관순 열사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체포 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재판을 거절한 유관순 열사는 공주 감옥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이후 유관순 열사는 살기를 원치 않는다며 종종 만세를 외치다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인사이트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유관순 열사 수형자 기록표 / 연합뉴스


그러던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는 일본 경찰의 지독한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의 강력한 항의로 인도됐으나 토막으로 난도질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의 애국심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있다.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오늘(28일) 오전 11시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서 순국 97주기 추모제를 올릴 예정이다. 


육군 장병이 뽑은 '유관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대한민국 육군 장병들이 '유관순 열사 역에 캐스팅하고 싶은 여배우'로 김고은을 꼽았다.


이승만은 '1등급'…친일파 농단에 훈장 등급 밀린 유관순 열사대한민국 광복의 초석이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 서훈등급이 3등급에 지나지 않는다.


배다현 기자 dahyeo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