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위안부 강제 징용에 대한 전범재판 기록 / 연합뉴스 (우) gettyimages
[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지난 2015년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맺어진 '위안부 합의'를 최종 결론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18일 KBS 뉴스 보도에 따르면 일본 간토 대학교의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 교수는 "태평양 전쟁 전범들의 증언을 기록한 '전범 조사집'(가칭)이 지난번 협상 과정에 반영되지 않았다"며 "한일 위안부 합의가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도에 따르면 전범 조사집은 일본 법무성이 재판을 받은 전범들을 상대로 당시 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KBS / 일 법무성의 ‘해군헌병’ 조사 문건
해당 조사집에는 "나에게 가장 무서웠던 건 위안부 사건이었다", "현지인 70명을 (위안부로) 발리에 데리고 들어온 건이 있다", "그 외에도 전쟁 중 약 4년간 200명의 부 녀자를 위안부로 오쿠야마 부대의 명에 따라 발리에 데리고 들어갔다" 등 일본 해군 헌병대 소속 조장의 증언이 실려있다.
또 "종전 후 군수부, 시설부와 강하게 담판을 짓고 약 70만엔을 본 건의 공작비로 받아 각 촌장들을 통해 주민들 공작에 사용했다"며 "그것이 완전히 효과가 있었다고 보여 가장 걱정했던 위안부 건은 한 건도 기소되지 않았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일본군이 부대의 명령에 따라 위안부를 조직적·강제적으로 동원했으며, 이것을 분명한 범죄로 인식해 군 자금을 사용해 은폐했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조사집은 '기밀'로 분류돼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2000년대 초반, 도쿄의 고서적 거리 '진보쵸'에서 이 조사집이 발견됐다.
이후 일본의 학자들은 위안부 강제 동원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당 조사집을 철저히 연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문서를 '공식 문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진상 조사에 있어 정부 내 내각 관방실에서 인정한 자료만 공식 문서로 삼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즉, 정부가 인정한 문서가 아니면 자료는 '있어도 있는 게 아닌' 구조다.
KBS / 일 법무성의 조사 문건
그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은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를 맺었다. '전범 조사집'에 기록된 자료는 협상에 사용되지 않은 채였다. 일본 정부가 이 문서를 지난 2월에서야 공식 문서로 인정했기 때문.
분명 정부 기관이 조사하고 국립 공문서관에 보관된 문서였지만, '공문서'로 인정받기까지 50년 세월이 걸린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교도 통신은 "내각 관방이 군인이 매춘을 강요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개별 자료의 평가는 하지 않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강제 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해당 조사집을 발굴한 하야시 교수는 "위안부 강제 동원을 입증할 자료가 당시 협상 과정에 반영되지 않은 것"이라며 "한일 위안부 합의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는 이유"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여성의 평화와 전쟁 자료관 홈페이지는 일본 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한 자료는 521건이라고 전하고 있다.
반면 해당 홈페이지에는 일본 정부에 '공문서'로 인정받지 못하는 위안부 관련 자료도 400여 건이나 올라와 있다. 군 보고서, 재판 기록 등 모두 공적인 내용이 담긴 자료들이지만 일본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 문서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황기현 기자 kihyu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