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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살 청년 '이한열'이 최루탄 맞아 숨진 날입니다"

지난 1987년 7월 5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 이한열 학생은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중 전경이 던진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인사이트연합뉴스


[인사이트] 성보미 기자 = 1987년 6월 9일 오후 4시40분경 연세대학교에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청년들과 이를 제지하는 전경과의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 이한열도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때 전경이 던진 최루탄이 이한열의 뒤통수를 가격했고 그는 얼굴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곁에 있던 연세대생 이종창은 피를 쏟으며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하며 뒷걸음질쳤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한열은 간신히 입술을 떼며 말했다.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을지 누가 알았을까.


인사이트


이후 부상당한 이한열과 이종창의 모습은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에게 포착돼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의 1면에 내걸리면서 독재정권과 무력진압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사이트(좌)당시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이한열-이종창의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사진과 함께 이한열의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민들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며 분노를 표하며 거리로 쏟아졌다.


이한열의 희생은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6월 29일 군사정권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한열은 마침내 이뤄낸 민주화를 보지도 못하고 7월 5일 새벽녘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인사이트


이후 같은해 7월 9일 160만명의 국민들은 연세대 본관부터 광주 5·18묘역까지 이어진 '민주국민장'에 참여하며 그의 마지막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5월의 광주가 백양로에서 울렸다. 어린 날, 나는 자연을 만끽했다.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온 지난 날이 부끄럽다

하여 오늘은 다시 살아나는 날, 내가 우리가 되는 날이어야 한다"


-1987년 5월 18일, 이한열이 과거 일어났던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겁이 나 숨어있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지은 자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