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서 친유럽 중도 성향의 도날트 투스크 총리와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운영권을 둘러싸고 정면 대결을 벌이며 심각한 헌정 위기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안나 코르빈-피오트로프스카 헌법재판관은 보그단 슈비에츠코프스키 헌법재판소장과 부소장의 직무를 정지한다고 선언하고 자신이 재판소 운영을 책임지겠다고 발표했다. 피오트로프스카 재판관은 현 집권 연립여당 주도 의회에서 선출된 인물인 반면, 슈비에츠코프스키 소장은 이전 우파 법과정의당(PiS) 집권 시절 의회가 선출한 인물이다.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이같은 조치를 "헌법기관에 대한 강제 장악"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아프리카 순방을 위해 이동 중이던 그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전용기 항로를 변경해 긴급 귀국한 뒤 곧바로 헌법재판소로 향했다.
(왼)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 (오) 도날트 투스크 / GettyimagesKorea
지난달 30일 밤 헌재 앞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며 몸싸움 등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PiS 지지자들은 헌재 앞으로 몰려들었고, 이들 앞에서 우익 정치인들은 투스크 정부가 재판소에 대한 쿠데타를 자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도날트 투스크 총리는 이번 조치가 사법부의 독립성과 법치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맞섰다. 그는 지난달 31일 엑스(X·옛 트위터)에 글을 올려 "이 과정은 어렵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단호한 행동이 필요하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충돌은 2023년 총선으로 집권한 친유럽 중도 연립여당과 2015년부터 2023년까지 8년간 집권했던 민족주의 성향의 PiS 간 뿌리 깊은 대립이 헌재 운영권 다툼으로 폭발한 것이다.
PiS는 집권 시절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우파 성향 인사로 교체했고, 이들이 재판부 과반을 장악하면서 국내외에서 헌재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훼손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폴란드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를 이유로 폴란드에 대한 약 1370억 달러(약 183조 원) 규모의 자금 지원을 동결하기도 했다.
2023년 정권 교체로 집권한 투스크 총리는 이전 우파 정부의 사법부 개편을 원상복구하고 헌재의 독립성을 회복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지난해 PiS의 지지를 받은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정부의 사법개혁 시도는 벽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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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올해 초 의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 6명 중 3명의 취임 선서를 거부했다. 기존 헌재 소장 또한 신임 재판관들의 취임을 저지하면서 양측 간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투스크 총리의 사법개혁 방식 또한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측근 인사를 새 헌재 재판관으로 선출하자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을 회복하겠다던 정부의 약속과 모순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헌재 운영권을 둘러싼 갈등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더욱 격렬해질 것으로 보인다. CNN은 "내년 총선에서는 폴란드의 헌정 질서와 향후 정치적 방향, 특히 EU와의 통합을 더욱 강화할지 아니면 거리를 둘지가 주요 쟁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