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은형이 11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출간했다. 지난 2015년 첫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이후 쌓아온 깊어진 통찰력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복잡한 이슈들을 다층적으로 조명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한은형은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거짓말'로 "문장의 솜씨와 일관성 있는 색채, 예민한 감수성을 무기로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미디어 속 실존 인물을 재조명한 팩션 '레이디 맥도날드'와 음식에 관한 여러 산문집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호흡해왔다.
이번 소설집은 비거니즘의 진정성, 안락사, 종교의 상업화, 모성의 사회적 의미, 재한 동포의 현실 등 우리 일상에 숨겨진 첨예한 문제들을 포착한다.
사진 제공 = 문학동네
'식물성 관상'에서는 푸릇하고 맑은 외모라는 이유만으로 "스태프가 아니라 호스트바의 접객원을 뽑는 듯한" 비건 식당에 고용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절담'은 화려한 행색과 말투를 가진 수행자답지 않은 승려를 바라보는 복잡한 시선을 담았다.
'빵과 우유'의 인물은 "훌륭한 가정주부가 되는 게 끔찍"하지만 가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모순 속에 있다. '피서'에서는 "외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동포들과 함께 사는 것이 괴로운 이의 내면을 그려낸다.
작가가 천착하는 지점은 특정 사회적 의제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적 상황을 통과하며 인물들이 겪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감정들이 핵심이다. 이들은 낭패감과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현실에 매몰차게 대처하지 못한다.
문학평론가 이지은은 해설에서 작가가 인물들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것으로만 회수되지 않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국면과 감정을 포착"한다고 평가했다. 한은형은 선과 악, 옳고 그름,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익숙한 이분법에서 비껴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작가는 소설집 서문에서 "달아나고 싶었던 그 세계를 재현하고 다시 망가뜨림으로써 계속 달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보이지 않는 일상의 윤곽을 비틀고 무너뜨려 나를 가둬두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작품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