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흥행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장항준 감독이 연출하고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가 출연한 이 작품은 단종의 비극적 운명을 그려내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의 성공과 함께 관객들은 작품 속에서 직접 다뤄지지 않은 관련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세조(수양대군)에게 원혼으로 나타나 '피의 복수'를 했다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 설화가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꿈속에서 시작된 저주의 서막
'대동야승(용천담적기)', '금계필담', '음애일기' 등 야사 기록에 따르면,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날 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났다.
현덕왕후는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데려가겠다"고 말하며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 꿈에서 깬 세조의 몸에는 곧바로 흉한 종기가 생겨났다.
세조가 심각한 피부병을 앓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다. 국보로 지정된 세조의 상의에는 당시 그가 흘린 피고름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조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원사를 비롯한 전국의 명찰과 온천을 찾아다녔다는 것도 정사에 기록돼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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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에 멈춘 세조의 아들들
세조를 더욱 괴롭힌 것은 자신의 병보다 연이은 자식들의 죽음이었다. 현덕왕후의 저주대로 세조의 두 아들은 연이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인 의경세자는 세조가 가장 총애했던 아들이었지만 20세에 급사했다. 죽기 전 "현덕왕후가 자꾸 나를 데려가려 한다"며 환각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들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세조가 직접 아들의 처소에 갔을 때, 아들의 목을 조르는 현덕왕후의 환영을 보고 칼을 휘둘렀으나 허공만 갈랐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결국 의경세자는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했다.
의경세자의 뒤를 이어 차남 예종 역시 즉위 1년 만에 형과 같은 나이인 20세에 요절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단종을 죽인 과보가 자식들에게 돌아왔다"는 말이 널리 퍼지며 세조의 통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광기로 변한 복수, 파묘와 서인 강등
아들들을 잃은 세조의 슬픔은 결국 광기로 바뀌었다. 세조는 저주의 원인으로 여겨진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을 파헤치는 극단적인 보복에 나섰다.
현덕왕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능을 파헤칠 때, 관이 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아 나무꾼들이 도끼로 내리쳐야 했다는 섬뜩한 일화도 남아있다.
우여곡절 끝에 꺼낸 관은 바닷가에 버려져 한동안 물때에 따라 갯벌에 잠기는 수모를 당했다.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없는 '부관참시'에 가까운 복수였다.
현덕왕후는 세조가 죽고 한참 후인 중종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왕후로 복권되어 종묘에 모셔진다.
영화 '왕과사는남자'
한편, 현덕왕후는 아들 단종을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에 단종의 폐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또한 의경세자는 단종이 죽기 전인 유배 후 사망했으며, 소릉을 파헤치는 사건 역시 단종 사망 전인 단종복위운동 직후 사건으로 기록돼 있는 등 야사의 기록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현덕왕후의 원혼 저주 설화가 중요한 역사적 야사로 거론되는 것은, 당시 민중들이 단종의 비극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평생을 피부병과 악몽, 그리고 자식들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아갔다. 이렇듯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슬픈 비극의 서사를 넘어 역사 속의 '권력의 허무함'을 되새기게 하며 또다른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