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류 시장이 생각보다 깊은 곳에서 방향을 바꾸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제품 경쟁과 가격 인상 뉴스가 이어지지만, 바닥의 물결은 다릅니다.
이제 술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회식과 폭음을 중심에 두던 집단 음주 문법이 느슨해지고, 개인의 취향과 컨디션을 우선하는 소비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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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누적된 생활 방식의 변화는 2026년에 들어 하나의 구조가 됐습니다. 집에서 술을 고르고, 모바일로 주문하고, 가벼운 도수로 기분만 즐기는 방식이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2024년 고위험음주율은 13.6%, 월간폭음률은 37.8%로 과거처럼 일괄적인 급등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령과 성별에 따라 흐름은 엇갈렸습니다. 20대 남성의 고위험음주율은 감소한 반면 30대 여성은 소폭 늘어나는 등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렸습니다.
같은 통계 안에서도 선택의 방향이 갈라지고 있다는 점은 음주 문화가 집단적 관행에서 개별 취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이볼과 제로 슈거가 만든 새로운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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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바로 하이볼의 부상입니다. 위스키와 탄산수의 단순한 조합이 집과 편의점, 레스토랑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표준 레시피가 됐습니다.
하이볼은 위스키를 "독한 술"에서 "가볍게 변주할 수 있는 베이스"로 재해석했고, 믹서와 잔, 얼음까지 포함한 경험 소비를 끌어냈습니다.
업계는 홈술의 정착과 하이볼 유행이 위스키 진입 장벽을 낮추고 토닉워터·탄산수·RTD 하이볼 등 관련 시장을 동반 성장시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소주 시장의 풍경도 달라졌습니다. 롯데칠성음료의 제로 슈거 소주 '새로'는 2025년 7월 말 기준 누적 7억 병을 돌파하며 하나의 상징이 됐습니다.
제로 슈거는 더 이상 변칙 카드가 아니라 주요 브랜드들이 따라가는 설계 기준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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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는 '덜 달고, 덜 무겁고, 다음 날이 가벼운 술'을 자연스럽게 묻습니다. 건강을 죄책감 없이 즐기자는 헬시 플레저의 감각이 주류 선택의 언어가 된 셈입니다.
무·비알코올 시장의 확장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로모니터 전망에 따르면 국내 시장 규모는 2023년 644억 원에서 2027년 946억 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술을 마시지 않지만 분위기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수요가 점심, 운동 후, 평일 저녁 같은 일상 시간대를 열어젖히며, 무알코올은 과거의 대체재에서 ‘상황에 따라 고르는 또 하나의 선택지’로 자리를 옮기고 있습니다.
가격이 밀어 올린 '집으로의 이동'
소비자를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결국 가격이었습니다. 외식 물가가 치솟으며 일부 식당의 소주 가격이 6,000원 선을 넘었다는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체감 비용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장소를 바꿉니다. 식당 테이블 대신 거실 소파가 주 무대가 됐고, 홈술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생활 양식으로 굳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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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의 중심축도 그 방향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편의점과 대형마트의 스마트오더는 희귀 와인과 한정판 위스키를 가장 빠르게 만나는 창구가 됐습니다.
GS25의 ‘와인25플러스’ 취급 품목이 7,000여 종에 이르고, 이마트24 ‘보틀오더’ 매출이 2025년 1~9월 전년 대비 6배 넘게 늘어난 흐름은 프리미엄 주류의 구매 경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홈플러스 스마트오더의 성장 역시 전장(戰場)이 식당 냉장고에서 모바일 화면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확인시킵니다.
술을 사는 장소가 달라지자, 브랜드가 소비자를 만나는 방식도 함께 달라진 것입니다.
양이 아니라 취향의 싸움
2026년 주류 시장은 분명한 전환점 위에 서 있습니다. 소비자는 일상에서는 가격과 컨디션을 먼저 따지고, 특별한 순간에는 경험과 품질에 기꺼이 투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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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잣대로 설명되지 않는 이 이중 구조가 시장을 모래시계 형태로 재편하며, 과거의 단선적 성장 공식을 조용히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 변화 앞에서 기업의 전략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량과 판촉에 의존하던 방식은 힘을 잃고, 수익성 중심의 포트폴리오와 데이터에 기반한 세밀한 제안이 핵심 역량이 됐습니다.
정체된 내수만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그리기 어려워지면서 글로벌 확장 역시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시장이 던지는 질문도 바뀌었습니다. ‘얼마나 팔았는가’보다 ‘누구의 취향을 얻었는가’가 더 중요한 척도가 됐습니다. 술은 가벼워졌지만, 소비자의 기준은 한층 정교해졌습니다.
취하기 위해 마시던 시대가 저물고, 즐기기 위해 고르는 시대가 왔습니다. 한국 주류 시장은 지금, 양의 산업에서 취향의 문화로 방향을 틀며 다음 장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