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을 방문한 유엔 특별보고관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삼성전자 백혈병 환자 등 피해 구제를 위해 직접 발병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국내 상황을 따끔하게 지적했다.
23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유해물질·폐기물 피해자와 만남을 가진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소속 배스컷 툰칵(Baskut Tuncak) 인권과 유해물질·폐기물 특별보고관은 예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우려를 표했다.
앞서 특별보고관은 옥시래킷뱅키저와 삼성전자 뿐만 아니라 기업,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와도 만남을 갖고 대화를 나누며 관련 자료를 받았다.
이날 그는 "삼성전자 등 유해물질을 다루는 많은 기업의 근로자들이 인권보다는 이윤 추구를 우선순위에 두는 환경에 놓여 있어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그는 "피해자와 유족 등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 유해물질을 접촉하는 환경에서 일하며 한 달에 하루 이틀밖에 쉬지 못했고, 유해물질에 대한 충분한 정보나 안전조치도 없었다고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덧붙여 그는 "한국 정부가 유해물질로 병이 발생했음에도 이에 대한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60여명 가운데 단 3명만이 정부의 산재보상 대상이 돼 다소의 보상을 받았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와 관련해선 한국 정부가 최근 피해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긍정적인 진전이 있다고 평가했지만 피해구제를 위한 인과관계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지우고, 예방 조치도 충분치 않았다고 평가했다.
특별보고관은 "한국 정부는 비준한 국제인권비준조약과 헌법에 명시된 안전과 환경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권리 실현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법제를 만들어야된다"며 "특히 어린이,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유해물질에 둘러싸인 농촌 주민 등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법과 제도가 존재해야 유해물질로 인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별보고관은 조사 대상국으로 한국을 선정한 데 대해 "불과 몇십 년 만에 급속한 산업화를 이룬 한국은 신흥경제국의 모델로 떠올랐다"며 "산업화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화학·유해물질의 사용과 관리 실태, 피해 사례 등은 다른 나라에도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추가 실태조사와 사실 관계 확인 작업 등을 거쳐 권고사항 등을 담은 최종결과보고서가 나오며 내년 9월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박다희 기자 dhpark@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