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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6일)은 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날입니다"

1944년, 저항시인 이육사는 조국 광복을 1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인사이트이육사문학관


[인사이트] 전준강 기자 = 76년 전 오늘, 일제에 저항하던 시인이 이 세상과 안녕을 고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엄혹한 시대를 밝게 빛내주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일본에게는 부끄러움이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황혼', '청포도' 그리고 '광야'로 유명한 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이다.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1925년 10대 시절 형들을 따라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큰형 이원기와 동생 이원일과 함께 3년의 투옥생활을 경험했다.


인사이트역사편찬위원회


당시 그의 수인번호가 바로 264(이육사)였다. 그는 "독립에의 사명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수인번호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는 어디를 가던 자신을 이육사로 소개했다. 그리고 출옥 후에는 일본 보란 듯 독립운동에 더욱 힘을 썼다. 중국으로 건너가 다른 독립운동단체와 결탁해 투쟁했다.


힘든 독립운동 중에도 시(詩)를 썼다. 1933년 고국으로 돌아와 '이육사'라는 이름으로 시집도 발간했다.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시였다. 지금 보아도 찬사를 받기 충분한 시였다.


인사이트이육사문학관


하지만 단 하나의 집단 만큼은 이 시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강렬한 저항과 민족정신은 일제의 분노를 샀다.


꾸준히 황혼, 청보도, 교목 등을 발표했다. 17회나 투옥되는 중에도 시작을 멈추지 않았다.


1941년, 그는 폐병으로 요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는 조국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1943년, 독립운동을 위해 찾은 중국 베이징에서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