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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폭동 때 흑인들 꼼짝 못하게 한 코리아타운 '예비군'들의 위엄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났을 때 한인 사회는 예비군을 중심으로 코리아타운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인사이트Thetruthaboutguns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들이 중심이 된 폭동이 일어났다.


인종차별에 분노한 흑인 및 소수 인종의 집단 반발에 도시 전체는 패닉에 빠졌다. 이들은 방화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고, 총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폭동이 일어난 지역 인근에는 수많은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폭도들이 한인 타운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한인이 운영 중이던 2,300여 개의 점포가 손실됐으며 집계된 피해액만 3억 5천만 달러(한화 약 4,112억 원)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폭도들에게 살해된 한국인은 없었다. 무엇보다 '예비군'들의 활약이 컸다.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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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이 일어나자 해병대 전우회 회원들이 한인들을 지키기 위해 LA 코리아타운으로 모여들었다.


해병대 전우회를 중심으로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이 소집됐고 특기에 따라 보직이 분배됐다.


이들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총기 사용 방법을 집중 교육시키는 한편 옥상에 진지를 구축해 저격병을 배치했다.


단 수 시간 만에 일반인들이 모여 군대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한인 사회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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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 3일째가 되자 미국 메이저 방송사들은 한인 코리아타운의 총격전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인 상가의 지붕에 설치된 M3 자동화기, 머신건 등이 카메라 화면에 비췄다. 


이어 코리아타운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죽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인타운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김창준 전 미연방 하원의원은 한 방송에 출연해 LA 폭동 당시의 상황을 전한 바 있다.


그는 "당시 한인들이 자신의 동네를 지키겠다고 해병대 모자를 쓰고 다녔다"라며 "미국 시장이었지만 한인들의 활약이 자랑스러웠다"고 밝혔다. 


이후 한인과 흑인 사이 격렬한 갈등은 빚어지지 않았고, 미국 내 유색인종으로서 공존을 모색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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