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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실력만으로 '학벌 차별' 뛰어넘어 최고의 자리 오른 CEO 5인방

최고의 학벌 없이도 자신만의 길을 뚝심있게 걸어 결국 국내 최고의 CEO가 된 5인방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한다.

인사이트(좌)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 (우)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 사진 제공 = YG엔터테인먼트, LG전자


학벌 편견 깨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CEO


[인사이트] 오시영 기자 =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꼬집듯 한국은 현재 심각한 학벌주의에 물들어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을 찾기보다 좋은 학교 '간판'을 따기 위해서만 노력하고, 쉴 틈 없이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학부모들은 학벌을 위해서라면 치열한 정보, 스펙 싸움을 벌인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행동도 이해가 간다. 한국에서는 학벌을 능력의 척도로 사용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실제로 능력이 있어도 학벌의 벽에 막혀 좌절하는 이들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학벌 없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고의 학벌' 없이도 자신만의 길을 뚝심 있게 걸어 최고경영인(CEO)이 된 5인방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한다. 


1. 한국 세탁기 세계 최고로 만든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인사이트조성진 LG전자 부회장 / 사진 제공 = LG전자


1956년생으로 올해 만 63세인 조성진 부회장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1976년 용산공고 기계과를 졸업한 후 전자제품을 만들고 싶어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에 입사해 세탁기 부서에 자원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세탁기 보급률은 1% 남짓으로, 일본 세탁기 기술도 제대로 베끼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기술로 세탁기를 만들고 싶었던 조성진 부회장은 입사 후 하루 18시간가량을 세탁기 공부에 몰두했다. 


대학 졸업장을 받은 친구들이 부러울 때면 조성진 부회장은 '간판'을 따는 대신 세탁기를 통해 실력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인사이트조성진 LG전자 부회장 / 사진 제공 = LG전자


조성진 부회장이 일본 기술을 배우기 위해 150번 넘게 일본을 드나들며 밑바닥부터 기술을 배운 일화나 공장 2층에 살림살이를 마련해 생활하면서 세탁기 개발에 '올인'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값진 노력 끝에 조성진 부회장은 1998년 세계 최초로 '고효율 DD(DirectDrive)' 모터를 적용한 세탁기를, 2005년에는 세계 최초로 듀얼분사 스팀 드럼세탁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세탁기를 개발해 손빨래 구현 6모션 세탁기, '트윈워시' 세탁기 등을 세상에 내놓은 조성진 부회장은 여러 직책을 거쳐 지난 2017년 마침내 LG전자 전 사업부를 아우르는 대표이사(부회장)로 승진하게 됐다.


조성진 부회장은 LG전자 수장이 된 첫해부터 역대 최대 실적을 이끌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그가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탄생한 'LG스타일러'도 호평받고 있다. 


스마트폰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 수많은 제품을 손수 분해하며 공부한다는 조성진 부회장, 그가 LG전자의 '아픈 손가락'인 스마트폰 사업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 사업실패에도 노점부터 다시 시작한 김상현 국대떡볶이 대표


인사이트김상현 국대떡볶이 대표(오른쪽) / 사진 제공 = 국대떡볶이


중고등학교 성적이 50명 중 30등 수준이었던 김상현 대표는 대학을 중퇴하고 부모님이 주신 학비로 처음 사업을 시작한 뒤 10년간 수십차례 사업에 도전했다.


군고구마 장사, 음식배달 서비스 등을 거쳐 야심차게 준비했던 의류 사업에도 실패하면서 김상현 대표는 약 1억원의 빚을 떠안았다.


보통 사람은 이 정도로 실패하면 사업의 꿈을 접기 마련이지만, 김상현 대표는 달랐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사업 생각뿐이었다. 


떡볶이를 먹으며 어린시절 추억을 떠올리던 그는 실패와 좌절을 모두 잊고 떡볶이 장사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인사이트Facebook 'kukdetopokki'


떡볶이 장사를 하기 위해 김상현 대표는 노점상 아주머니를 따라다니며 맛있는 떡볶이의 비법을 물었고, 아주머니는 결국 5분간 조리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허락했다.


김상현 대표는 그 5분을 잊지 않도록 계속 떠올렸다. 6개월간 떡볶이만 먹으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이후 2008년 이대에서 노점장사를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투자를 받아 국대 떡볶이를 가로수길 1호점이 문을 열었다. 


지난 2014년 국대떡볶이 170호점을 돌파하며 크게 성공한 김상현 대표는 가맹비를 없애는 등 본사와 가맹점이 꾸준히 상생하는 길을 찾고 있다.


3. 좋아하는 일해 성공한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


인사이트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 / 뉴스1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프로 댄서가 된 양현석 대표가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였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가요계에서 은퇴한 뒤, 양현석 대표는 1996년 신사동 허름한 건물 지하 1층에서 '현기획'이라는 간판을 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직원 네 명에 낡아빠진 소파 하나가 회사가 가진 전부였다. 허름한 소속사지만 꿈은 야무졌다. '킵식스'라는 남성 3인조 그룹을 야심차게 선보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냉랭한 반응을 받으며 '현기획'은 불과 8개월만에 처참한 실패를 겪고 문을 닫게 된다.


양현석 대표는 이때 자금난 때문에 직접 솔로 1집을 내고 활동하기도 했다. 스스로도 이 시기를 흑역사로 꼽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인사이트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힙합 음악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뜨거웠다. 양현석 대표는 1997년 '억대' 빚을 내 지누션을 데뷔시켜 대박을 터뜨린다.


YG엔터테인먼트는 원타임, 휘성, 거미, 세븐, 빅마마 등이 연이어 히트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후 영입한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세계적인 히트를 치도록 도우며 초대박을 터뜨렸다.


빅뱅, 2NE1, 블랙핑크 등 세계에서 인정받는 아이돌 그룹을 길러낸 YG엔터테인먼트는 '패밀리'를 지향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가수들이 편하게 자신의 역량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가수를 기를 때 '투자비' 명목으로 회수하는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지누션, 쿠시같이 오랫동안 함께한 가수들은 성장해 회사의 중역을 맡았다.


가수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도와 최고의 역량을 이끌어내는 양현석 대표는 학업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던 경험을 가장 잘 활용하는 CEO라고 할 수 있다.


4. 베트남 제사상에 '초코파이' 올리게 만든 이경재 오리온 대표


인사이트(좌) 이경재 오리온 대표, 뉴스1 / (우) 사진제공 = 오리온


집집마다 제단을 모시는 베트남에서는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초코파이다.


'박항서 매직'이 베트남에 불기 한참 전부터 이경재 대표의 '초코파이 매직'은 베트남을 조용히 휩쓸었다.


이경재 대표는 1977년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오리온에 입사했다. 이후 줄곧 영업직에서 근무해 사내 최고의 영업통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던 2007년 이경재 대표는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뽐낼 수 있는 베트남 법인장 자리로 올라서게 된다. 


인사이트오리온 초코파이 CF


이경재 대표는 당시 고작 10여 명 남짓이던 오리온 베트남 법인 영업사원을 2천여 명으로 늘리고 사원들과 함께 현지 매장을 직접 찾아가 청소와 걸레질 등 궂은일을 도왔다. 


그 결과 베트남 법인장 취임 첫해 이경재 대표는 매출을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올렸다.대표로 선임되기 전인 2014년에는 매출 1,500억원대를 달성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경재 대표는 베트남 법인장으로 활약하는 동안 베트남에서 초코파이가 '고급 과자', '국민 간식'의 이미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초코파이 신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영업능력을 인정받아 이경재 대표는 지난 2015년 오리온의 대표가 됐다.


이경재 대표는 특기인 해외영업 부문에서 뛰어난 감각을 보이고 있다. 사드 보복 여파로 휘청이던 오리온을 연속적자에서 구하면서 다시 한 번 학벌보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5. "수입차 한국법인 최초 회장" 김효준 BMW코리아 회장


인사이트김효준 BMW코리아 회장 / 뉴스1


김효준 회장은 평소 학력에 따른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이름 앞에 항상 붙는 '고졸 출신' 꼬리표가 자연스러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김효준 회장의 성공 신화는 한국에서는 드문 경우다. 그는 1975년 삼보증권에 입사한 후 외국계 보험사인 하트포드화재보험, 제약사 한국신텍스를 거쳐 많은 경험을 쌓았다.


특히 한국 신텍스에서 근무하던 시절 충북 음성에 공장을 지을 때 허가가 나오지 않아 회사를 철수해야 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발로 뛰며 군청 직원들을 설득해 공장 허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


이 일로 김효준 회장은 신텍스 미국 본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덕에 한국 신텍스 부사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김효준 BMW코리아 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호텔에서 최근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BMW차량 화재 사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갖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김효준 BMW코리아 회장(오른쪽)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


외국계 기업 재무통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회사가 합병되면서 1995년 BMW코리아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자리를 옮겼다.


김효준 회장은 외환위기 시절 한국을 떠나려는 BMW 본사를 설득해 오히려 저금리로 막대한 돈을 투자 받고 한국시장의 경쟁력을 키우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부사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본사 개발 엔지니어에게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어 내비게이션을 개발할 것을 부탁했다. 그 결과 한국어가 독일어, 영어에 이어 내비게이션에 추가됐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벤츠를 이기기 어려웠던 BMW는 김효준 회장 덕에 시간이 흐를수록 수입차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실제로 2000년 차량 판매 대수가 1,650대, 직원 수가 30여명에 불과했던 BMW는 지난 2016년 판매 대수는 4만 8,459대로 30배가량 늘었고 직원 수도 5,000명에 달할 정도로 늘었다.


지난 2017년 12월 김효준 회장이 수입차 한국법인 최초로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그는 학벌보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있다.


인사이트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BMW 판매 매장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