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남영동 1985'
[인사이트] 디지털뉴스팀 =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간절했던 32년 전 오늘(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겨우 22살의 젊은 청년이 숨을 거뒀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좁고 깜깜한 방에서 반복되는 고문을 당하다 끝내 숨진 이는 박종철 열사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열사는 학교 인근 하숙집 골목에서 강제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고문을 받다 지난 1987년 1월 14일 끝내 숨졌다.
학생회장을 맡을 만큼 굳세고 총명했던 박종철 열사가 체포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된 이유는 그가 박종운 민주 운동가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사관들은 박종운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박종철의 옷을 벗기고 욕조로 끌고 가 끔찍한 물고문을 반복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남영동 1985'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결박한 두 다리를 들어 올려 또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박종철 열사는 고문 도중 질식으로 숨을 거뒀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의 사망에 대한 경찰의 발표가 이상했다.
당시 경찰 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궤변과 함께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중앙일보 기자가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를 통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가 박종철 열사를 부검한 의사에게 "물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양심 증언을 끝까지 추적해 보도한 끝에 그 진상이 밝혀졌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1987'
대학생을 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진실을 축소 은폐하려 한 정권에 분노한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독재자'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냈다.
지난 13일에는 경찰의 고문과 폭행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박종철 열사의 희생으로 되찾은 자유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되찾고 싶었던 22살 대학생 박종철 열사의 정신은 32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