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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여론, “日 아베 총리, 과거사 진솔하게 사과하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9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꺼낼 ‘과거사 언급’을 놓고 미국 워싱턴 내에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9일(이하 현지시간)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꺼낼 '과거사 언급'을 놓고 미국 워싱턴 내에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일종의 예고편으로 인식돼온 22일(인도네시아 현지시간) 반둥 연설이 아시아 피해국들의 기대에 턱없이 못미친 탓이다. 아베 총리는 과거 전쟁행위를 '반성'한다고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과'를 하지 않았고, 역대 담화를 관통하는 핵심어인 '식민지배'와 '침략'이라는 단어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22일 "예상은 했지만 실망스럽다"며 "결국 미 의회연설에서도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의 기대를 충족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런 분위기는 21일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주미 일본 대사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강연에서 이미 감지됐다.

 

26일 아베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사실상의 사전브리핑 형태로 진행된 이번 강연에서 사사에 대사는 "과거사 문제가 적절히 다뤄질 것"이라면서도, 아베 총리는 미국과 대화하러 오는 것이지, 반드시 다른 나라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과거 태평양 전쟁의 당사자였던 미국에는 사과하더라도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에는 고개를 숙일 뜻이 없음을 에둘러 표현했다는 평가다.

 

이는 지난해 7월 호주 캔버라에서 행한 의회 연설대로 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캔버라 연설은 호주를 상대로 저지른 전쟁행위를 사과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게 핵심이었고, 주변국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이 같은 '과거사 외면' 행보를 바라보는 워싱턴의 시각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다.

 

의회와 언론을 중심으로 아베 총리가 과거사에 대해 깨끗이 인정하고 진솔하게 사과하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회에서는 친한파 의원들이 적극적이다. 2007년 하원 위안부 결의안 통과의 주역인 마이크 혼다(민주·캘리포니아)·찰스 랭글(민주·뉴욕)·스티브 이스라엘(민주·뉴욕)·빌 파스크렐(민주· 뉴저지) 하원의원이 21일 저녁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 모여 특별연설을 했고, 그레이스 멩(민주·뉴욕)·세일라 잭슨 리(민주·텍사스) 하원의원은 공식 의사록에 글을 올렸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를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게 공통의 주문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인 뉴욕 타임스(NYT)가 지난 20일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을 정면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한데 이어 워싱턴 포스트(WP)는 곧 방미 중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을 예정이다. 미국 여론주도층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포브스도 아베 총리를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보수매체인 위클리 스탠더드와 극보수단체인 티파티의 웹사이트인 '레드 스테이트'는 아베 총리의 연설날짜를 연기하라는 주장을 내놨다. 위클리 스탠더드의 부편집인인 에던 엡스타인은 "미국의 가장 핵심적인 동맹인 일본의 총리가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것은 좋다"며 "그러나 날짜를 잘못 골랐다"고 지적했다. 이 부편집인은 "그날은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기리는 쇼와(昭和)의 날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미국의 참전용사들도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레드 스테이트도 "아베 총리가 연설할 29일은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로서, 이날 연설을 하겠다는 것은 참전용사들과 아시아 동맹국들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연설일을 다른 날짜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싱크탱크에서도 아베 총리의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대표적 지일파 학자인 미국 아태안보센터 소속 제프리 호넝 교수는 CSIS에 글을 올려 "아베 총리에게 부족한 것은 분명하고 명백한 방법으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다"며 "이번 연설에 과거사 문제를 포함해야 하며, 중심적 내용은 아니더라도 간결하고 명백하게 언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데니스 핼핀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연구원도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명백하게 사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정보지인 '넬슨 리포트'를 운영하는 크리스 넬슨은 21일 특파원들과 만나 "아베 총리는 이번 연설에서 무라야마 담화처럼 역사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07년 하원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추동해냈던 한인단체들도 8년 만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용수 할머니를 초청한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회장 이정실)는 23일 미국 의회 레이번빌딩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아베 총리 기간의 활동계획을 설명할 예정이다. 이 단체와 시민참여센터는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뉴욕과 보스턴 등지에서도 아베 총리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합동연설을 준비 중인 아베 총리로서는 커다란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는 게 워싱턴 외교소식통들의 설명이다. 주변국이 수긍할만한 과거사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가는 자칫 예기치 못한 역풍이 불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혼다 의원은 21일 의회 특별연설 직후 특파원들과 만나 "아베 총리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실망할 것"이라며 "역사를 바로잡을 소중한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아베 총리는 최대한 막판까지 미국 내부의 여론동향을 주시하면서 최종 연설 문안을 다듬을 가능성이 크다고 외교소식통들은 전했다. 특히 합동연설에 쏠리는 압박감을 덜어내기 위해 대학생이나 동포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주변국에 대한 과거사 언급을 내놓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소식통은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관심은 아베 총리가 가장 중요한 입장표명 기회인 합동연설에서 어떤 식으로 과거사문제를 정리할 것이냐에 쏠려 있다"며 "책임을 교묘히 피하려고 과거사 언급을 조각조각 분산하거나 모호한 수사를 동원할 경우 도리어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음을 일본 측은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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