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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직전 "배 12척 뿐이다" 당당히 말하고 일본군 두드려 팬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해전에 앞선 2번의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배가 12척이란 사실을 일본에 알렸고, 이는 이순신 장군이 펼친 고도의 전략이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유명한 이 대사처럼 이순신 장군은 1597년 '명량해전'에서 단 12척의 배로 333척의 일본 수군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


전 세계 해전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승리였고, 이순신 장군이 고도의 전략과 전술로 만든 '쾌거'였다.


단 12척의 배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걸까. 


그가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세운 전략 중 하나는 '12척'이라는 조선 수군의 규모와 '이순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는 명량 해전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략이었던 만큼 이순신 장군은 신중히 전략을 펼칠 기회를 엿봤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 '불멸의 이순신'


앞서 원균과 선조의 시기와 질투로 미움을 샀던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 갔었던 사이 원균의 무능력함으로 조선 수군은 괴멸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이 오랜시간 어렵게 만든 대규모 함대였으나 크게 무너져 단 12척의 군함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남은 12척의 배로 어떻게든 승리해야만 했다.


긴 고심 끝에 이순신 장군은 명량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수장시키기로 한다.  


이를 위해 일본군을 명량으로 유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명량의 좁은 물길과 거센 물살을 이용하려면 최대한 많은 일본군이 몰려와야 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명량 해전이 일어나기 18일 전, 전남 해남 어란진에 일본군 척후선 8대가 나타나자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를 드러내며 이를 격퇴한 후, 명량과 가까운 진도 벽파진으로 본진을 옮겼다. 


일본군을 명량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이때 조선 수군의 규모가 12척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55척의 군함을 이끌고 벽파진까지 이순신 장군을 추격한다.


일본군의 공격을 사전에 파악했던 이순신 장군은 벽파진을 공격해 온 일본군을 또다시 처절히 박살 냈다. 


어란진과 벽파진에서 12척의 조선 수군에게 연달아 패배한 일본군. 그들은 곧 패배보다 더욱 큰 불안감과 마주한다. 


일본군 내에 '이순신이 돌아왔다'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명량'


조선 수군이 12척에 불과하다는 것과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그들은 두려운 이순신 장군을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수백 척의 군함을 이끌고 명량으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명량 대첩 전날인 9월 15일(음), 이순신 장군은 장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그의 말대로 전투에서 필사의 각오로 싸운 조선 수군은 수백 척의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일본군은 배 31척이 격침당하고, 최소 3천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반면, 그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에도 조선 수군의 배 '12척'은 온전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