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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전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애국 지사가 또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가가 일어나기 4년전 경기도 안양의 한 청년은 기차에 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돌을 던졌다.

인사이트(좌) 원태우 의사 초상화, (우) 원태우 의거 표지석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의거로 사살된 국권 침탈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투지와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에 앞서 '돌멩이'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한국인의 저항 의식을 보여준 사람이 있다.


바로 23세의 농민이었던 원태우 의사다.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던 원태우 의사는 1905년 이뤄진 을사조약에 분노를 느끼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결심했다.


인사이트원태우 의사 의거 기록화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때는 1905년 11월 17일. 안태우 의사는 평소 뜻을 함께했던 이만여, 남통봉, 김장성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을 세운다.


이토 히로부미가 경부선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는 정보를 얻은 안태우 의사는 기찻길에 커다란 돌을 놓고 전복시킬 계획이었다.


그는 기차가 전복되면 어떻게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거사 직전 동료 이만여가 겁을 먹은 채 철로에 있던 돌을 치워버렸고, 이에 미리 계획했던 거사는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인사이트원태우 의사가 히로부미가 탄 열차에 투석한 곳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하지만 오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만을 바라봤던 원태우 의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달리는 기차 안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멩이를 던져 죽이기로 한다.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30km 정도. 더구나 이들이 거사를 계획했던 서릿재 고개는 내리막길 경사가 급해 열차의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는 구간이었다.


언덕 위에 올라가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던 원태우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보이자 힘차게 돌을 던졌다.


돌은 창문을 뚫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적중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에 깨진 유리 파편이 박히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인사이트원태우 열사 석상 / YouTube '경기도뉴스포털'


이 일로 경찰에 붙잡힌 원태우 의사는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00대를 맞았다.


이후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해야 했고, 해방될 때까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1950년 6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비록 원태우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며 반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는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에 추서되었고, 현재 경기도 안양시에 그의 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