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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벌벌 떨게 했던 '중국 장군'이 도시락 폭탄 들고 윤봉길 의사를 만났다

8월 8일 오늘은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만들었던 숨은 독립운동가가 영면에 든 날이다.

인사이트(좌)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훈터', (우) 독립기념관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1932년 4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가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중국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일본은 왕웅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 군인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군인이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제작해 지원했다는 의심을 품고서였다. 일본은 앞서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일본 왕 히로히토에게 던진 폭탄도 왕웅이 제공했다고 보았다. 


일본이 수사에 나선 그때 왕웅은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살고 있었다. 결국 일본은 왕웅을 붙잡기는커녕 그 정체도 끝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가 던졌던 폭탄 의거에 관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러나 그 폭탄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폭탄을 제조한 이의 이름은 여러 개였다.


인사이트(좌) 김구 선생과 김홍일 장군, (우) 중국 장제스 주석과 김홍일 장군 /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훈터'


왕웅, 왕일서, 왕부고 등으로 불린 이 중국군 장군의 본명은 김홍일. 한국인이었다.


1898년 태어나 조선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김홍일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왕웅이란 이름을 사용, 중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뒤 중국군에 장교로 입대했다.


중국군 소속으로 숱한 전투를 치르고 계급도 올라간 김홍일, 왕웅은 군부대 무기를 관리하는 부서인 병기창으로 근무했다. 


총이나 폭탄 등을 수시로 다루는 부서의 책임자였다는 뜻이다. 그만큼 독립을 위한 무기를 확보하기에 용이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백범 김구에게 중국군 장교 왕웅은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왕웅 장군은 김구의 '백범일지'에 수차례 등장하기도 한다.


인사이트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은 이봉창 의사의 일본 왕을 향한 수류탄 역시 왕웅에게서 나왔다.


장군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실패한 일을 거울삼아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폭탄을 만들었다. 폭탄을 완성한 뒤에는 김구와 함께 시험까지 해 완벽을 기했다. 


두 폭탄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쓰였다. 의거는 성공했다.


의거 이후에도 김홍일 장군은 중국 군대에서 줄곧 주요 직책을 맡으며 정보를 수집하고 그곳에서 만난 한국 청년들을 독립군 장교로 육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리고 38년 전 오늘인 1980년 8월 8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