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기념사업회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31년 전 오늘(5일)은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은 뒤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만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이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1966년 8월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이한열은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목도한다.
부조리에 맞서는 시민들을 보며 학생 운동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한 때가 중학교 2학년, 그의 나이 15살이었다.
이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대학생 이한열은 중앙동아리를 창설하는 등 운동권에서 구심점 역할을 도맡으며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
네이선 벤
1987년 6월 9일이었다.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이 날 각 대학에서 출정식이 열렸고, 이한열 역시 학생 2천여 명과 함께 연세대 정문으로 나섰다.
당시 이한열은 학생과 전경 사이에 대치하면서 시간을 버는 전위대 역할을 맡았다. 다른 학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행진하는 학생 무리에 전경들은 무자비했다. 학생들을 에워싸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오후 4시 40분, 한 전경이 수평으로 쏜 최루탄은 친구들을 지키려고 뛰어다니던 스무 살 청년 이한열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피가 쏟아지는 이한열을 발견한 같은 학교 학생이 그를 끌어안고 학교로 도망쳤다. 그동안 이한열은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프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신을 들어 옮기는 학생들에게 "(힘들 텐데) 쉬었다 가자"고 하기도 했다는 이한열은 같은 날 오후 5시 30분에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끝내 의식을 잃었다.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한열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졌다. 시민들은 어린 학생에게 일어난 비극에 분노했고,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군부 독재를 타도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민주화'를 외친 6월 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결국 성난 민심 앞에 전두환 군사정권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 이한열의 바람이었던 민주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가슴에 자유를 향한 열망을 지핀 이한열은 민주화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1987년 7월 5일 새벽, 조용히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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