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7일(토)

"오늘은 68년 전 6‧25 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인사이트Facebook '대한민국 육군'


[인사이트] 이경은 기자 =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 기록한 명언처럼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는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 있다.


그는 바로 68년 전 오늘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6월 25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로 불리는 6‧25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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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Facebook '대한민국 육군'


1945년 우리나라는 일제 패망과 동시에 광복을 맞이했지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이념적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립된 이념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선제타격작전 계획에 따라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남침'이 일어난 것이다.


급작스럽게 남침한 북한군을 정부와 군은 막지 못했다. 


인사이트1945년 반탁운동 당시 연설하는 이승만 모습 / 온라인 커뮤니티


이승만은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6월 28일 새벽, 한강교량까지 폭파시키며 도망쳤다.  


이로 인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들이 서울에 고립됐고, 국군 주력부대의 퇴로도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후퇴를 거듭하며 밀리던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전세가 역전됐고, 연합군은 그 기세를 몰아 38선을 돌파해 압록강 국경지대까지 치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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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전쟁이 끝나는 것 같아보였으나 28만 명의 중공군이 북한에 힘을 실어주면서 전쟁의 양상은 또 다시 크게 바뀌게 됐다.


후퇴와 반격이 반복되는 우여곡절 끝에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무려 전쟁 발발 3년 1개월 2일, 회담 개시 24개월 17일 만이었다.


6‧25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사망‧부상‧실종 등을 합해 남한은 160만의 사상자가, 북한은 35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사이트뉴스1


전쟁이 끝난 뒤, 휴전 상황에서 수많은 갈등도 겼었다.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도 있었고, 북한군에 의해 남한 시민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제1, 2차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건 그리고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등 국가를 수호하는 군인이 사망하는 일도 있어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행히도 전쟁이 일어난 지 68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4월 손을 맞잡은 남과 북 두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종전'을 골자로 하는 판문점 선언을 하며 평화의 싹을 틔웠다.


우리 민족의 가장 가슴 아픈 역사로 꼽히는 6‧25전쟁은 그저 역사 속에 묻어둔 채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