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8일(일)

"우리 아이 못봤소" 5·18 때 잃어버린 8살 아들 38년간 찾아다닌 아버지

인사이트Youtube '비디오 머그'


[인사이트] 진민경 기자 = "요만한 꼬마 아이 하나, 못 보셨소"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38년째 이어오고 있는 한 아버지가 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내를 점령한 계엄군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그때 이귀복(당시 44세)씨의 아들 창현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오늘(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하루도 편할 날 없던 이귀복 씨의 절규가 재현됐다.


인사이트Youtube '비디오 머그'


이날 이귀복 씨의 사연을 전하기 위해 배우 남경읍 씨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기념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우리 창현이 못 보셨어요?"라며 울음에 찬 목소리를 내었다.


그가 전한 눈물 젖은 사연은 이렇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여파로 그다음 날인 19일 창현 군이 다니던 광주 양동 초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당시 이귀복씨는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전남 완도까지 가서 건축업에 몸담고 있었다. 빠듯한 살림을 챙기려 그의 아내 역시 화장품 외판원으로 일했다.


창현 군은 물론 그의 누나와 동생이 집에 홀로 남겨진 그 날도 이귀복씨와 그의 아내는 어김없이 일터로 향해야 했다.


어머니가 일을 나간 사이, 심심했던 창현 군은 집을 나섰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밤늦게까지 어린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일을 마치고 온 어머니는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들을 애타게 찾았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초록색 윗도리에 깜장 바지". 그날 창현군의 어머니가 목이 쉬어라 길을 가던 시민들에게 물었던 그 질문은 도청 앞에서 만난 군인들에게도 건네졌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디찼다. 군인들은 "집 나간 아이를 찾으려 하지 말고 집에 있는 자식 관리나 잘하라"고 쏘아붙였다.


이 말을 듣고 공포에 질린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남은 자식들을 꼭 끌어안았다.


뒤늦게 이귀복 씨가 완도에서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둘째 창현 군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로 아들을 찾아 나섰다.


인사이트5·18 기념재단


그때만 해도 그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 이토록 오래 이어질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던 중 1989년 5·18 유족회가 발간한 '광주민중항쟁 비망록'이라는 책 1면의 사진 속에서 이귀복씨는 단번에 총상을 입은 채 숨진 창현군을 알아봤다.


피로 물든 광주 광장에서 이제 막 8살 난 어린 창현 군도 목숨을 잃었다. 


이후 아들 시신이라도 찾겠다며 사방으로 돌아 다닌 게 벌써 38년이 흘렀다.


그 사이 생활고로 힘들어하던 아내는 남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떠났다.


인사이트Youtube '비디오 머그'


끝내 창현 군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1994년 5·18 민주화운동 행방불명자로 기록됐다.


3년이 흐른 1997년 5월 4일 국립 5·18 민주묘지 내 행불자 묘역에 창현 군의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에는 창현 군의 넋을 위로하는 '이창현군의 령'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묘비 뒷면에는 '7세의 나이로 학교를 다닌 지 2개월 만에 M16 총상·공수부대·내 아들 창현이를 아버지 가슴에 묻는다'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인사이트1980년 5월 19일 행방불명 된 이창현 군 / Youtube '비디오 머그'


38년간 애타게 자식을 찾으러 다닌 아버지는 기념식장을 찾은 이들을 향해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심정이다. 이렇게라도 해주셔서 내 마음이 기쁘다. 오늘 우리 아들 죽은 뒤로 내 마음이 처음으로 흐뭇하다"고 울음에 잠긴 목소리를 힘겹게, 꿋꿋이 옮겼다.


한편,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 165명, 상이 후 사망 110명, 행방불명 81명, 부상 3,559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유족들은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지우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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