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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97년 전 오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유관순 열사가 18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던 유관순 열사는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7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 헌병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극악무도한 일제는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고자 어린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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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약품을 발라 가발을 벗기듯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거나 펜치로 손톱과 발톱을 뽑는 등 고문한 것이다.
또 입에 호스를 연결해 뜨거운 물이나 각종 오물을 투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면도칼로 귀와 코를 깎거나 달군 쇠로 성기를 지지는 등 잔혹한 성(性)고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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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수치심을 주기 위해 다른 독립 열사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내는 것은 물론 일본 사람들 앞에서 목에 개 줄을 묶은 채 네 발로 기어 다니게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던 유관순 열사는 결국 1920년 9월 28일, 18세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인은 일본 경찰의 지독한 고문에 의한 방광·자궁 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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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프라이와 윌터 선생이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달라고 강력히 항의하자 일제는 난도질당해 토막 난 시신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후 일제는 자신들의 악행을 숨기기 위해 고문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두 폐기했다고 한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던 유관순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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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묘는 일제가 군용기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졌고, 지금은 지난 2015년 9월에 세워진 추모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황기현 기자 kihyu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