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모(58)씨는 주말마다 동네 산악회를 따라나서지만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리는 일이 잦다. 10년 전 받은 왼쪽 무릎 반월판 수술 부위가 가파른 오르막이나 돌계단 앞에서 어김없이 시큰거리기 때문이다. 결국 이씨는 등산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경사가 거의 없는 숲길만 골라 다니기 시작했다.
퇴행성 관절염을 앓거나 수술 이력이 있는 중장년층, 어린 자녀를 유모차에 태운 부모, 휠체어 이용자 모두 가파른 산길 앞에서는 똑같은 처지에 놓인다. 이들에게는 '정상 정복'보다 턱 없이 끝까지 걸을 수 있는지, 중간에 쉴 벤치가 충분한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실제로 산림청이 운영하는 숲길 정보 상담 창구에도 최근 들어 "계단 없는 코스를 추천해 달라"는 문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산림청과 각 지자체가 경사도를 대폭 낮춘 '무장애 나눔길'을 전국 휴양림과 도심 산림욕장에 잇따라 조성하고 있다. 일반 등산로의 평균 경사도가 15~20%에 달하는 것과 달리, 무장애 나눔길은 장애인·고령자 편의 기준인 8% 이하로 설계돼 휠체어나 유모차도 별도 보조 없이 지나갈 수 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된 이미지
바닥은 흙길 대신 미끄럼 방지 처리를 한 목재 데크나 단단하게 다진 흙으로 마감해 비가 온 뒤에도 접근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기존 데크 구간을 연장하거나 야간 조명, 벤치 간격을 촘촘히 늘리는 등 편의시설 보강도 꾸준히 이어지는 추세다. 지자체들은 이 같은 코스를 단순 산책로가 아니라 고령화 시대에 대응하는 생활밀착형 복지 인프라로 규정하고 관련 예산을 매년 늘려가고 있으며, 올해 들어서도 기존 휴양림 내 무장애 구간을 추가로 연장하는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서산 계곡길·대전 전망데크
충남 서산 용현자연휴양림 / 산림청 국립용현자연휴양림 홈페이지
충남 서산 용현자연휴양림의 무장애 나눔길은 참나무와 낙엽송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 한가운데로 턱이나 계단 없이 데크가 곧게 이어진다. 전체 구간 내내 맑은 계곡물이 바로 옆에서 흐르는 구조라 여름철에는 수온이 체감상 뚜렷하게 낮아 피서객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데크 폭은 휠체어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조성됐고, 구간 중간중간 쉼터와 음수대가 배치돼 노약자도 무리 없이 전 코스를 완주할 수 있다.
대전 서구 장태산자연휴양림의 '스카이웨이'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메타세쿼이아 군락 사이를 관통하는 나선형 데크로,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지상 15m 높이에서 숲 꼭대기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에 닿는다. 엘리베이터 없이도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설계된 램프 덕분에 휠체어 이용자가 계단 한 번 거치지 않고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두 코스 모두 반나절 일정으로 소화할 수 있어 당일치기 수도권·충청권 나들이 코스로도 입소문을 타고 있다.
장성 편백숲·서울 안산길
축령산편백숲 / 장성군 홈페이지
전남 장성 축령산의 '축령산편백숲'은 국내 최대 규모인 약 253만㎡ 편백나무 조림지를 가로지른다. 다져진 흙길과 데크가 길게 연결돼 휠체어나 전동스쿠터 진입이 가능하도록 폭 2m 이상으로 조성됐고, 코스 중간중간 그늘막과 벤치가 넉넉하게 배치돼 있다. 편백나무 특유의 피톤치드 농도가 짙은 구간으로 알려지면서 호흡기 질환자나 아토피를 앓는 아이를 둔 가족 단위 방문객도 많이 찾는다.
서울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은 전국 최초의 순환형 무장애 코스로, 총 길이 약 7㎞ 전 구간에 턱이나 계단이 전혀 없다. 서대문구청에 따르면 이 자락길은 개통 이후 하루 평균 수천 명이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으며, 도심 한복판에서 능선을 따라 서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코스로 꼽힌다.
지하철 3호선 홍제역이나 독립문역에서 걸어서 접근할 수 있어 별도 차량 없이도 찾기 쉽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서대문구는 자락길 완주 인증 스탬프 행사를 상시 운영하며 어르신 건강 걷기 프로그램과 연계해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안산 자락길 / 한국관광공사
네 곳 모두 입장료는 받지 않거나 성인 기준 1000~2000원 안팎의 소액만 부과하며, 주차장에서 숲길 입구까지도 평지로 연결돼 접근이 쉽다. 용현자연휴양림과 장태산자연휴양림은 성수기 주차 공간이 빠르게 차는 만큼 오전 10시 이전 도착을 권장하는 안내문을 각 지자체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축령산 모꼬지길은 전동스쿠터 무료 대여 서비스를 시범 운영 중이며, 안산 자락길은 연중무휴로 개방돼 일몰 이후에도 조명을 밝혀 야간 산책이 가능하다. 네 코스 모두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하지만 목줄 착용은 필수이며, 겨울철에는 데크 결빙을 막기 위해 제설 작업을 우선적으로 진행하는 구간으로 지정돼 있다.
산림청 숲나들e 누리집 홈페이지
각 지자체 홈페이지와 산림청 숲나들e 누리집에서 실시간 혼잡도와 데크 보수 공사 일정을 확인한 뒤 방문하면 헛걸음을 줄일 수 있다. 네 코스 모두 유모차나 휠체어 대여소를 입구 매표소 인근에 두고 있어 별도 장비 없이 찾아도 당일 현장에서 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