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 19일(월)

'전기 선박'만으로는 부족... 한화 김동관 부회장이 제시한 항만 중심 전동화 해법

전기차가 도로에 안착한 것은 완성차 기술만의 결과가 아닙니다. 충전소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달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선박 전동화 역시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배 한 척을 전기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전기를 받아들이는 항만이 함께 준비되지 않으면 전동화는 정착할 수 없습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이 지점을 정면으로 짚었습니다. 김 부회장은 지난 14일(현지 시간) 세계경제포럼(WEF) 공식 웹사이트 기고문을 통해 '전기 추진 선박 해양 생태계' 구축을 제안했습니다. 전기 선박 개발과 함께 에너지저장장치(ESS), 항만 충전·배터리 교체 인프라, 탈탄소 전력 공급 설비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19일 개막한 WEF 연차총회를 앞두고 던진 메시지였습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 뉴스1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 뉴스1


핵심은 단순합니다. 전기 추진 선박은 바다 위에서 충전할 수 없습니다. 항만에 정박해 전력을 공급받아야 하고, 충전이 이뤄지지 않으면 운항 자체가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선박을 아무리 전동화해도 항만 전력망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운항 계획과 경제성은 동시에 흔들립니다. 전동화의 병목이 선박이 아니라 항만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선박 전동화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과제는 전력망입니다. 전기 선박이 늘어날수록 항만의 접속 용량을 키워야 하고, 변전 설비와 배전 인프라를 전면 재설계해야 합니다. 충전기 몇 대를 더 설치하는 차원이 아니라 항만 운영 체계 자체가 '전력 중심'으로 재편되는 사안입니다.


두 번째는 ESS입니다. 항만은 전력 수요가 특정 시간대에 몰리고, 선박은 정박 시간 동안 대량의 전력을 집중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전력망을 무작정 증설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저장 설비를 통해 피크를 흡수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됩니다. 김 부회장이 기고문에서 '안정적인 ESS'를 콕 집어 언급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진제공=한화그룹사진제공=한화그룹


세 번째는 전기의 출처입니다. 항만에서 공급되는 전력이 화석연료 기반이라면, 해상에서 줄인 배출이 육상으로 이전되는 셈이 됩니다. 전기 추진 선박이 '실질적인 탈탄소'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항만 전력화가 재생에너지 등 청정 전력 조달과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규제 흐름은 선박 전동화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은 해운을 배출권거래제(ETS)에 편입했고, 2024년 배출분에 대한 배출권 제출 의무를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확대합니다. 2026년에는 제출 비율이 70%로 높아지고, 2027년부터는 100%를 적용받습니다. 전동화에 실패할 경우 배출 비용은 고스란히 해운사와 화주 부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2030년부터는 일부 주요 EU 항만에서 컨테이너선과 여객선이 정박 중 육상전원공급(OPS)을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항만이 전기를 준비하지 않으면 선박 역시 규제 대응이 어려워지는 구조입니다. 전동화의 성패가 항만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한화는 이런 '항만형 해법'을 실제 사업으로 연결하려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화엔진은 지난해 12월 노르웨이 전기 추진·전력 자동화 기업 SEAM 인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전기 추진 장치뿐 아니라 전력 제어와 시스템 통합 역량까지 확보해, 선박 전동화의 핵심인 전력 관리 영역을 묶어가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됩니다.


사진제공=한화그룹사진제공=한화그룹


안전 문제 역시 항만과 선박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ESS는 무게와 비용 부담이 크고, 해상 화재 위험을 낮추기 위해 냉각과 방재 기술의 완성도가 요구됩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SK엔무브가 2024년 '액침냉각' 기반 ESS 기술을 공개한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업계에서는 상용화까지는 추가 검증과 인증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해외 경쟁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중국 CATL과 고션 하이테크 등 배터리 업체들이 선박용 배터리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시장 선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는 CATL은 순수 전기선박 구현 가능성을 잇달아 언급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 부회장이 기고문에서 언급한 '유럽 항만 당국과의 시범사업 논의'는 시장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항만명과 적용 범위, 사업 모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항만을 중심으로 한 전동화 실증 사업이 본격화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필리조선소 인수를 통해 조선 사업 기반을 다져온 김 부회장이 또 다른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관측도 업계에서 나옵니다.


업계에서는 전기 추진 선박 전환의 승부처를 '기술'보다 '운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항만 전력망 증설 인허가, 청정 전력 조달 계약, ESS 안전 기준과 보험, 충전 요금 체계까지 함께 설계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 부회장이 제시한 '해양 생태계' 구상은 결국 전동화의 스위치를 항만이 쥐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