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위 건설사로 평가되는 현대건설이 지방의 한 가로주택정비사업 현장에서 계약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수준의 공사비 인상을 요구하며 착공을 미뤘다가 130억 원이 넘는 배상 책임을 지게 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최근 공사비 급등을 계기로 조합·시행사와 시공사 간 갈등이 잦아진 가운데, 초대형 건설사가 고의적 시간 끌기라는 취지의 법원 판단을 받은 사례여서 업계 파장이 작지 않을 전망입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중앙지법 민사16부는 대구 중구 태평78상가아파트 가로주택정비사업 시행자인 한국토지신탁이 현대건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현대건설의 착공 지연 책임을 인정하고, 현대건설이 한국토지신탁에 132억 5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현대건설이 정당한 사유 없이 공사 착공을 지연해 도급계약상 해제 사유를 스스로 초래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현대건설 사옥 / 뉴스1
이 사업은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합쳐 약 430가구 규모의 정비사업입니다. 한국토지신탁과 현대건설은 2020년 공사비 1205억 원에 도급계약을 맺으면서, 공사비 산정 기준 시점을 2019년 5월로 두고 2020년 10월 이후 실제 착공 시점까지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을 기준으로 공사비를 조정하기로 합의했습니다.
2022년, 현대건설이 물가 상승과 설계·마감 변경 등을 이유로 기존 공사비에서 488억 원을 더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이 가운데 물가 상승분으로만 제시한 금액이 386억 원 수준으로, 계약 당시 약속한 소비자물가지수 기준을 그대로 적용했을 때 산출되는 인상률 8.42퍼센트를 크게 웃도는 수치였습니다. 전체 공사비 기준으로는 약 40퍼센트 인상을 요구한 셈입니다.
한국토지신탁은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른 8퍼센트대 인상까지는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며, 그 이상은 계약 범위를 벗어난다고 맞섰습니다. 2023년 2월, 이미 이주가 마무리된 상황에서도 공사비 협의는 결렬됐습니다.
그러자 현대건설은 계약 변경이 이뤄지지 않은 것을 이유로 철거 공사 착수와 계약보증금 납부를 계속 미뤘습니다. 한국토지신탁이 철거 공사 수행 계획 제출과 계약보증 이행을 수차례 촉구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2024년 10월 도급계약 해제를 통보한 뒤 소송에 나섰습니다.
법원은 책임 소재를 현대건설 쪽에 뚜렷하게 돌렸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현대건설이 도급계약에 따라 공사에 착수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계약상 공사비 인상 기준인 8.42퍼센트를 현저히 넘어서는 인상을 요구하면서, 계약 해제 시점까지 착공에 나서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당한 사유 없이 1개월 이상 착공을 지연한 것으로 봐야 하고, 이는 도급계약에서 정한 해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진제공=현대건설
현대건설은 재판 과정에서 소비자물가지수를 공사비 조정 기준으로 삼은 조항이 무효에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소비자물가지수가 실제 건설 원가 상승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해당 조항을 그대로 적용하면 시공사에 과도한 부담이 돌아간다는 논리였습니다. 또 한국토지신탁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사실상 협의 없이 해당 조항을 밀어 넣었다는 취지도 내세웠습니다.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오간 공문과 협의 경과 등을 근거로, 현대건설이 해당 조항을 알고도 도급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발주처인 한국토지신탁이 일방적으로 조건을 강요했다고 보기 어렵고, 계약의 전제가 된 경제 여건이 조항의 효력을 뒤집을 만큼 중대하게 변경됐다고 보기도 힘들다고 봤습니다.
이번 판결로 현대건설은 도급계약에서 정한 계약보증금 120억 5000만 원에 부가가치세를 더한 금액을 손해배상 예정액으로 물어주게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정비업계에서는 이미 시공사가 선정된 이후 조합이나 시행사가 협상력에서 밀리는 구조를 이용해 공사비 증액을 압박해 온 관행에 제동을 건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대형 건설사가 지방 소규모 현장까지 포함해 공사비 재협상을 시도해 온 상황을 고려하면, 앞으로 공사비 분쟁에서 이번 사례가 중요한 기준점으로 인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